요즘 그럭저럭 잘나가는 서울시향에 비해 KBS 교향악단(이하 KBS향)은 안팎으로 심한 내분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 때 한국의 양대 관현악단이라고 평가받던 시절은 환상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인데, 악단의 연주력은 둘째 치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악단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을 듯 보인다.
아무튼 KBS향은 방송국에 소속된 한국 유일의 정규 편성 관현악단이고, 이 때문에 많은 연주회가 녹음되거나 녹화되고 있다. 그와는 별도로 음반도 의외로 많이 제작했는데, 많은 수가 시장에 나온지 얼마 안되어 폐반되거나 해서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문제지만.
하지만 중고음반 시장을 돌다 보면 가끔 이 악단의 음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물건은 그 중에도 시판품이 아닌 비매품이라 특이한데, KBS향의 음반들은 대부분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정규 음반사에서 시판품으로 제작되었고, 비매품으로 제작된 음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 2001(?) Agfa Korea Ltd.
2001년 9월 21일에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는 한국과 벨기에의 수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 음악회가 열렸는데, 이 때의 실황을 담은 CD가 저 물건이다. 그 때문인지 CD의 제작도 벨기에와 독일의 합자 회사인 아그파의 한국 지사가 맡았다고 표기되어 있다.
당시 공연에 관한 기사를 찾기가 힘들어 공연 때 연주된 곡이 모두 CD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CD에 수록된 곡들은 이렇다.
디르크 브로세(Dirk Brossé, 1960-): 밀레니엄 서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3번 (박종화 협연)
디르크 브로세: 바이올린과 현악 합주 '흑백과 그 사이' (이경선 협연)
프레데릭 데프레세 (Frédéric Devreese, 1929-): 모음곡 제 3번 '벤베누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제외하면 모두 벨기에 작곡가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는데, 지휘는 네 곡 모두 브로세가 맡았다. 네덜란드나 벨기에 작곡가는 상당히 생소한 편이라 위키를 찾아봤는데, 브로세는 헨트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주로 영화음악이나 뮤지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데프레세도 암스테르담 태생의 벨기에 작곡가 겸 지휘자로, 낙소스 산하의 마르코 폴로에서 자신을 포함해 플란데런(프랑스어로는 플랑드르) 근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직접 지휘해 음반으로 만든 경력이 있다.
두 작곡가의 작품 모두 이 음반으로 처음 들었는데,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작곡가들이지만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통속성이 매우 강한 맛을 풍겼다. 물론 수교 기념 음악회라는 격식 있는 자리에서 소위 '높으신 분들' 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전위적인 음악은 배제한 것으로도 여겨지는데, 물론 선곡된 곡들 모두 이 경축 공연에서 제값을 하고는 있다.
중간에 섬처럼 고립되듯이 들어 있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지난 번 이혜경-서울시향-정재동 콤비의 2번에 이어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들었는데, 전체적으로 안정적이기는 했지만 다소 밋밋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 녹음도 지난 번 정치용 지휘 서울시향 녹음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가까운 마이크 세팅으로 인해 메마른 느낌의 소리가 연속되다 보니, 오래 들으면 귀가 쉽게 피곤해지는 단점도 있었고. 그리고 너무 짧게 편집한 박수 소리도 좀 이상하게 들린다.
속지와 전체적인 디자인은 사진과 필름 제조로 유명한 업체가 맡은 탓에 깔끔한 편인데, 다만 이런 종류의 음악회 CD가 그렇듯이 곡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략하고 연주자 프로필에 좀 더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조된 것은 따로 한 페이지 씩을 할애한 당시 주한 벨기에 대사 쿤라트 루브루아의 공연 축사와 아그파 코리아의 사장 마티아스 아이히호른의 회사 약력 소개와 축사.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음악회 아후 아그파와 KBS향 모두 쇠락하는 모습을 면치 못했고, 특히 아그파의 경우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기존의 필름 제작과 판매 사업에 큰 타격을 입어 2005년 파산 신청을 하고 말았다. KBS향은 2004년에 키타옌코의 상임 지휘자 퇴임 후 후임자를 찾지 못해 거의 5년을 객원 지휘에 의존해야 했고, 2010년에 함신익이 부임한 뒤에도 계속 지휘자와 악단이나 방송사와 악단 사이의 갈등 양상이 보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한국 관현악단의 음반을 입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때 부산의 중고음반점 먹통닷컴에서 또 하나의 진귀한 CD를 구할 수 있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