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나 한국 등 동양권 만화가들의 작품은 의외로 많은 수가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출판되고 있는데, 작년에 반 년 가량 머문 독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출판되는 만화의 가짓수나 출간 속도는 본국에 비할 바 못되지만, 서양인들 중에도 이런 만화를 사서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단행본이 나오는 것이겠고.
개인적으로도 독일 체류 중에 이런 독일어판 만화 단행본을 좀 구입해 들고 오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는데, 무엇보다 단행본 가격이 한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상당히 비싸다는 것이 문제였다. 평균 가격대가 권당 6~7유로나 되었고, 그나마 한국의 도매상처럼 할인해 주는 서점도 없었다. 도서 정가제가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벼룩시장(Flohmarkt)에서도 이런게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제값 주고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체류 말미에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수하물 무게였는데, 결국 추가 요금을 내는 것이 두려워서 이것저것 질러서 바리바리 싸들고 올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지를 만한 돈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체류 최후반기, 그러니까 어학 시험인 TestDaF를 막 끝마친 뒤 뒤셀도르프 중앙역에 있는 서점에 가서 한 권을 사온 것이 모리 카오루의 최신 연재작인 '신부 이야기' 의 1권 단행본이었다.
한국보다 1년도 더 늦은 2011년 8월에야 1권이 발행된 것을 보면 이 곳의 신간 발행 속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올해 1월에 2권 단행본이 나왔고 3권도 5월 9일 쯤에 나온다고 되어 있으니 조금은 연재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짐 무게만 많이 안나갔다면, 그리고 여윳돈이 있었자면 차라리 독일 아마존에서 '엠마' 1~10권을 질렀을 테지만, 욕심을 부리면 끝도 없어서 이걸로 만족해야 했다.
뒤셀도르프의 서점들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보였던 일본/한국 만화의 단행본은 도쿄팝(Tokyopop)과 칼젠(Carlsen) 두 출판사에서 간행된 것들이었다. 이 중 도쿄팝의 경우 원래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하는 출판사였지만, 2011년 5월에 경영난으로 인해 미국 본사가 문을 닫고 지금은 독일 지사만이 운영되고 있다.
'엠마' 와 '신부 이야기' 도 이 도쿄팝을 통해 독일어판이 나오고 있다. 다만 '신부 이야기' 의 경우 한국어판이 이슈 콜렉션 레이블을 달고 나왔기 때문에 같은 레이블의 단행본들과 크기를 맞추려고 판형을 좀 키워서 인쇄한 것에 반해, 도쿄팝의 독일어판은 일본판과 같은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대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데, 뒷표지에는 대략적인 작품의 줄거리나 컨셉이 독일어로 인쇄되어 있고 작품의 연령 등급과 장르가 나와 있다. 이것은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신부 이야기' 의 경우 15세 이상 구독 가능이라고 되어 있다. 말도 안돼 장르는 역사물로도 볼 수 있겠지만, 도쿄팝에서는 로맨스로 분류한 모양이다.
독일어판인데 왜 제목이 영어로 'Young Bride's Story' 라고 되어 있냐고 태클걸 사람도 있을 텐데, 영어 실력이 이미 상당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별 신경 안쓰는 눈치다. 게다가 일본 만화의 주요 독자들인 젊은 층에서는 이미 영어 단어를 독일어에 상당히 많이 섞어서 쓰는 '뎅글리시(Denglisch)' 를 구사하고 있으니, 오히려 독일어로 'Die Geschichte der jungen Braut' 라고 번역했다면 딱딱한 소설 마냥 그다지 손에 가지도 않았을 테고.
폰카로 찍은 거라 상당히 구리기는 하지만, 뒷표지의 독일어 줄거리. 모리 화백의 일러스트를 잡아먹은 것이 아깝지만, 이게 이 곳의 단행본 디자인 관행인 것을 어쩌리. 내용이야 같은 작품의 번역본이므로 거의 차이는 없지만, 편집상으로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물론 번역자의 번역 방향에 따른 차이점도 있고.
독일어판 번역은 알렉산드라 케를(Alexandra Keerl)이 맡았는데, 아직 독일어 지식이 많이 일천하고 일본어 원판을 읽을 실력도 안되므로 번역이 얼마나 잘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사전 찾아가며 느리게 읽어보니 크게 튀는 오역은 없었다.
주인공들의 이름 표기. 한국어판에서 '아미르 하르갈' 로 번역된 여주인공 이름은 '아미라 할갈', '카르르크 에이혼' 으로 번역된 남주인공 이름은 '카를룩 에이혼' 으로 되어 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한국어판의 오역이 있기는 한데, 실제로 중앙아시아에 살던 부족 집단인 카를룩 부족에서 따온 이름이었지만 한국어판에서는 가타카나 음차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저렇게 나와 버렸다.
그렇다고 독일어판도 인물 이름 번역이 그렇게 잘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일본어 원판에도 '아미루(アミル)' 라고 되어 있는 것을 왜 '아미라' 라고 했는지 좀 이해가 안된다. 하르갈도 비슷하게 읽으려면 'Hargal' 이 되어야 했겠지만, r 대신 l을 써서 할갈이 되어 버렸고. 다만 아미르의 경우 어원이 아랍어에서 '남성 지도자' 를 뜻하는 것이므로, 여주인공의 성별과 안맞는다고 생각한 번역자의 주관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독일어판 단행본에서 또 흥미로운 것은 의성어의 처리였다. 한국어판 단행본들의 경우, 예전부터 편집 상의 오류로 그대로 실리는 경우를 빼면 모든 대화와 의성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독일어판의 경우, 뭔가 보충 설명이 필요한 몇 군데를 제외하면 일본어 의성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아미르가 직접 잡아온 토끼로 스튜를 끓이기 위해 손질하는 장면. 보면 알겠지만 일본어 가타카나로 쓰여진 의성어가 그대로 실려 있다.
카를룩과 아미르가 친척인 우마크 일가를 찾으러 갈 때 무리에서 길을 잃고 남겨진 새끼양을 발견하는 장면. 여기서도 양의 울음소리 의성어는 일본어 그대로다. 이미 그림만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상황이니 더 이상의 번역이 必要韓紙? 이렇게 남겨두고 있다.
물론 이렇게 그림만 봐도 이해가 되는 의성어 외에, 의성어만 나오는 말칸이나 인물의 행동 만으로 유추가 안되는 의성어는 번역을 하고 있다.
스미스가 토끼 스튜를 먹다가 미처 제거하지 못한 화살촉을 씹는 장면. 한국어로 '으득' 정도 되는 'Knirsch' 로 번역해놓고 있다.
카를룩이 재채기하는 장면. 아무 인물 그림 없이 의성어와 펜선만 있는 말칸이므로 가타카나 의성어 밑에 Hatschi라고 독일어 재채기 소리를 같이 번역해 놓았다.
그리고 폭력 묘사에는 어느 유럽 국가보다 자비심이 없지만, 성 묘사에는 그렇게까지 까다롭지 않은 독일의 문화 환경 때문인지 한국어판에서는 지워진 아미르의 하우두유두(...)가 그대로 인쇄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것도 스캔해 비교해 보고 싶었지만, 요즘 게임과 웹툰 사냥으로 경험치를 쌓고 있는 여가부와 문광부가 매의 눈으로 야리고 있어서 관뒀다.
물론 이것 때문에 15금 등급을 받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모든 만화 단행본을 래핑으로 꽁꽁 싸놓고 파는 한국과 달리 누구든 대충 읽어볼 수 있게 래핑 안하고 파는 독일 서점에서는 등급에 그다지 강제성이 있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거기서도 18금 이상 먹은 것은 얄짤없이 래핑되어 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책이 우철 인쇄되는 독일의 출판 관행 때문인지, 좌철 인쇄되는 단행본에는 이렇게 마지막 페이지라는 경고문과 읽는 방법이 간략하게 들어가 있다. 그리고 한국어판 단행본에는 없는 다음 권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도 밑에 나와 있고.
겨우 한 권 딸랑 산 독일어판 단행본이지만, 나중에 또 독일에 갈 일이 생기면 그 때는 기필코 엠마 전권을 독일어판으로 구입해 가져올 예정이다. 물론 신부 이야기도 거기서 나온 것까지 합쳐서. 그러니까 빨랑 셜리 독일어판 내놓으라고 도쿄팝 신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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