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은 주로 현대음악 작곡가로 알려진 인물인데, 워낙에 이름 자체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취급받고 있어서 작품 뿐 아니라 이런저런 발언이나 스캔들로도 사후 4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 논쟁 떡밥이 던져지고 있다.
물론 저 대가도 나이가 들면서 괴팍한 언동이나 말도 안되는 비과학적 궤변, 과대망상에 가까운 사고관 등으로 까이기는 했지만, 비단 '순수음악' 전공자들 뿐 아니라 프리 재즈 아티스트들이나 전자 시대에 들어선 마일즈 데이비스, 온갖 사조의 음악을 섭렵한 록 아티스트 프랭크 자파 같은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여길 인물은 아니다.
슈톡하우젠은 생전에 작곡가 뿐 아니라 연주자, 배우, 지휘자 등의 역할로 주로 자신의 작품 연주에 관여했는데, 다만 피에르 불레즈나 한스 첸더 등과 달리 다른 사람의 작품을 지휘한 경력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히 이례적으로 다른 작곡가, 그것도 한참 이전 시대의 작품을 지휘한 음반이 있었다.
독일에 있을 적에 지인의 위탁으로 구입해 들고온 음반들 중 하나였는데,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1번과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이 담긴 CD였다. 아래 짤방 밑에 적힌 대로 슈톡하우젠이 당시 서베를린에 있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을 지휘한 물건이었다.
ⓟ 1985 FonoTeam GmbH
사실 저 CD는 의뢰를 받고도 뭔가 확신이 안서는 물건이었다. 슈톡하우젠이 정말 저 고전 작품들을 지휘한게 맞냐는 의문을 차치하더라도, 음반을 낸 포노팀이라는 회사가 예전에 이런저런 방송국 실황 녹음들을 무단으로 발매해 악명을 떨친 해적판 제작 경력으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격도 다른 음반들에 비하면 턱없이 싼 것이 오히려 그런 의심을 부추겼고.
하지만 독일 큐르텐에 있는 슈톡하우젠 출판사 사이트에서도 이 녹음들이 담긴 CD가 팔리고 있었고,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샘플 파일과 비교 청취해본 결과 동일한 물건이 확실했기 때문에 주문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뢰였으니 이게 정발판인지 해적판인지 굳이 그렇게 꼬치꼬치 따질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저 지인도 원래는 슈톡하우젠 출판사에서 판매하는 CD를 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슈톡하우젠 출판사의 CD에는 다른 음반사에서 발매되지 않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까지 담고 있는데, 다만 35유로라는 고가였고 저 출판사에 직접 주문해야 구입할 수 있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음반에 녹음 관련 정보가 너무 부실해서 월드 카탈로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하이든 협주곡은 1985년 6월 27일에, 모차르트 협주곡은 다음날인 28일에 녹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녹음 장소는 베를린 필이 필하모니가 완공되기 전에 연습 장소이자 녹음 스튜디오로 사용했던 베를린 달렘 지구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였다.
지휘자 이름이 신경쓰일 뿐이지 고전 협주곡들을 담고 있는 평범한 염가반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듣다 보면 꽤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음반이었다. 모차르트 협주곡의 독주자는 네덜란드 출신의 플루티스트 카틴카 파스페어(Kathinka Pasveer)인데, 1982년에 덴 하그 왕립 음악원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현대음악 세미나에 특별 초빙된 슈톡하우젠을 만나면서 현대음악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실제로 슈톡하우젠은 후기 작품을 작곡할 때 파스페어를 독주자 혹은 비중있는 연주자로 설정한 적이 상당히 많고, 심지어 플루티스트 뿐 아니라 마임 연기자나 무용수로도 기용했다.
하이든 협주곡에서 협연한 트럼페터는 마르쿠스 슈톡하우젠(Markus Stockhausen)으로, 성씨부터 똑같아 가족 관계임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슈톡하우젠의 아들인 마르쿠스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아버지의 작품들에서 연주할 정도로 출중한 트럼펫 실력을 갖고 있었고, 쾰른 음대에서 클래식 트럼펫과 재즈 트럼펫을 복수 전공한 뒤 양 장르에서 골고루 활동하며 영화음악 작곡도 병행하고 있다.
연주의 인상은 약간 느린 템포를 제외하면 괴팍해 보이는 현대 작곡가의 지휘라는 편견이 무색할 정도로 정통적인데, 그렇다고 특별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카덴차에서 슈톡하우젠의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 협주곡들에 나오는 모든 카덴차는 슈톡하우젠이 파스페어와 아들 마르쿠스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것들이다.
그래서 카덴차들을 들어 보면 처음에는 뭔가 고전적인 느낌의 애드립 같아 보이지만,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던 플러터 텅잉(혀나 목젖을 빠르게 떨어서 내는 떠는 음 주법)이나 다양한 비브라토, 다소 무조적으로 느껴지는 프레이징에서 다른 카덴차들과 확연한 개성이 느껴진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처음 들어보고 충격과 공포의 그지 깽깽이를 느꼈던 알프레트 시닛케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카덴차 만큼 강렬한 똘끼(???)가 없어서 좀 유감이었지만.
이 음반에는 없지만 슈톡하우젠 출판사에서 발매하는 음반에 있는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도 해당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부분적으로 들어봤는데, 원래 카덴차 부분이 없는 이 곡에도 슈톡하우젠 자신이 쓴 카덴차를 집어넣어 연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스페어와 함께 슈톡하우젠 후기 작품 연주의 달인인 클라리네티스트 수잔 스티븐스(Suzanne Stephens)가 마찬가지로 슈톡하우젠 지휘의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과 연주했다는 저 녹음도 언제 한 번 음반으로 온전하게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