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사람 같은 경우에는 제목에도 특별히 두 가지 표기법을 다 쓴 이유가, 정말 애매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가 시대 조류에 잘못 휩쓸려 제대로 쓴맛을 봤기 때문이었고.
장 원여는 1910년에 타이완-당시 일본 식민지였음-북부의 탐수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네 살때 가족들이 본토인 샤먼으로 이주하면서 거기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열세 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나가노현의 우에다에 있는 학교에서 만난 외국인 음악 교사한테 처음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부터 이름 표기는 일본식인 고 분야로 했고.
다만 그 때까지는 전문 음악가를 지망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우에다의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낮에 무사시 고등공과학교에서 전기 기술자 교육을 받고, 밤에 도쿄 음악학교 성악부 야간 강습을 듣는 '주독야독'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음악학교에 드나들던 모 합창단 지휘자가 고 분야를 특별 채용했고, 1932년에는 일본 유명 음반사 중 하나인 컬럼비아 레코드(현 일본 컬럼비아) 전속 바리톤 가수로 기용됐다.
이렇게 짭짤한 일거리를 얻은 것 외에도 성악 콩쿨에 출전해 두 차례 입상했고, JOAK(현 NHK의 전신. 통칭 도쿄 방송국)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 나 푸치니의 '라 보엠' 같은 오페라의 공연을 중계해 전국 방송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성악가 활동을 하는 틈틈이 야마다 고사쿠나 하시모토 구니히코에게 작곡도 배웠다는데, 저 두 인물은 그 당시 일본 양악계의 중진들이었고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소위 '관제(라고 쓰고 애널써킹이라고 읽음) 음악가' 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전후에 이리저리 까이기도 했던 인물들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음반사들에서는 일종의 국책 사업 격으로 전시가요 (혹은 전쟁가요) 녹음과 레코드 출반이 잦아졌는데, 고 분야도 '폭탄 3용사의 노래' 라는 전시가요를 레코드로 취입했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됐는데, 저 노래는 상하이 사변 때 중국군 진지를 자폭으로 돌파한 일본군 공병대원 세 명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진상을 살펴보면 저 세 병사는 진지로 돌격하던 중 중국군의 총격으로 죽었고, 지니고 있던 폭탄은 나중에 폭발했다고 함)
어쨌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는 부대 행사로 열린 '예술 경연대회' 에 '대만무곡' 이라는 관현악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것이 3등을 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고(영어판 위키) 가작에 당선됐다는 소리도 있지만(일어판 위키) 어쨌건 거기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 분야의 작품 중 처음으로 작품 번호가 달려 출판됐는데, 이러한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1938년에는 베이징 사범대학교 음악 교수로 임용되었다. 다만 저 시점에서 베이징은 이미 일본군 손아귀에 있었고, 고 분야도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 자격으로 교수 활동을 했던 것이었고.

그러다가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했고, 아직 중국 본토 쪽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적성국인으로 분류되어 수용소 신세를 지게 되었다. 고 분야도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는데, 거기다가 국민당 정권이 고 분야가 일본 체류 시절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미화하는 전시가요를 녹음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대동아민족행진곡' 이라는 곡을 작곡한 등의 행적을 친일 부역행위라고 문제삼아 '한간' 이라고 낙인찍으면서 10개월 실형도 살아야 했다.
출옥하고도 합법적으로 일본에 돌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고 분야는 다시 중국 이름인 장 원여를 쓰면서 주둔군인 미군 클럽의 재즈 밴드 일자리를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 일본에 일본인 부인과 딸이 있었지만 결국 재결합을 단념하고 중국 여자와 재혼했는데, 아마 그 시점에서 중국에 남아 살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장 원여의 또다른 치명적 실책이 되었고.
그나마 우파 쪽에 속했던 국민당 정권이 마오쩌둥의 홍군에게 계속 패퇴하면서 1949년에 타이완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중국 본토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장 원여는 그 이전인 1947년부터 베이징에서 중앙음악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었는데, 다만 그 때는 아직 창업기였던 새로운 정권이 이전의 행적을 별로 문제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장 원여는 정부가 제시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방침을 따라 창작을 해야 했고, 자신의 개성을 많이 억제해야 했다.
그러다가 1957년에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 이라는 스탈린식 농업 집단화 운동을 벌이면서 당 내부의 우파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병행한 '반우파 투쟁' 때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 원여도 이 때 우파로 낙인찍혀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는 아예 일본의 앞잡이라는 뜻인 '일간' 으로 낙인찍혀 거의 모든 자필보나 출판 악보와 피아노, 음원 자료들이 홍위병들의 손에 파괴되거나 소각되어 버렸다. 그리고 장 원여 자신도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고 '하방노동' 이라고 해서 시골로 강제 이주당한 뒤 고된 농사일에 시달려야 했고.
그렇게 육체적이건 정신적이던 계속 고통을 당하다가 1977년에 문화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장 원여도 이듬해에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하지만 이미 건강은 회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악화되어 있었고, 창작력도 거의 고갈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1981년 12월에는 처음으로 중국 국영 라디오에서 '장 원여 교수와 그의 음악 작품들' 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 공식적으로 최초의 리바이벌이 이루어졌는데, 그것도 장 원여의 운명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장 원여는 결국 1983년에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이후 고향이었던 대만이나 일본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서서히 언급되기 시작해 지금은 연주 금지 같은 조치 없이 자유롭게 연주되고 거론되고 있다. CD도 아직 국내에 정식 수입은 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나와 있는데, 총선날 투표 끝내고 가봤던 신촌기차역 근처 중고음반점에서 대만 음반사인 '선라이즈(上陽)' 가 1993년에 출반한 것을 한 장 입수할 수 있었다.

1940년에 도쿄에서 발표한 무용극 '향비(香妃, The Princess Shian-Fei)' 와 작곡 연대 불명의 관현악 '일자동광(一字同光, Symphonia Universalis)', 그리고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 작곡에 몰두했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아 동료 작곡가들이 완성시킨 관현악 모음곡 '아리산의 노래(阿里山的歌聲, The Song of Ali Mountain)' 세 곡이 들어 있고, 연주는 레오니드 니콜라예프(Leonid Nikolayev) 지휘의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관현악단(Moscow State Conservatory Orchestra)이라고 되어 있다.
일단 들어보니 고향인 타이완이나 중국 쪽 민속음악 영향도 들어 있고, 일본 음악 영향도 있고 그 당시 최신 유행이었다는 모더니즘 영향도 있었다. 이렇게 상당히 다채로운 영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생애를 쭉 봤을 때는 저 인물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인지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사실상 자멸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고 생각되어 좀 씁쓸했다. 차라리 아사히나 다카시나 오자와 세이지처럼 기민하게 일본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지나간 역사에서 가정법을 쓰는 것도 말이 안되어 보이고.
장 원여의 사례도 당시 예술가들의 현실 인식 능력이 빈약했다는 증거로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프로코피에프 같은 경우에도 (서방에 있었으면 아마도 겪지 않았을) 정치적 비난의 시련을 소련에 귀국하고 나서 당했던 것을 보면 좀 비슷하다고도 생각된다. 낙소스에서 나올 예정이라는 장 원여의 앨범에는 어떤 곡이 실릴지 궁금한데, 그것 보다는 낙소스가 요즘 한국 수입길이 막혀있는 것 같아 걱정이고. (수입사인 아울로스에서 신보를 더 이상 들여오고 있지 않는 것 같다. lllOTL)
p.s.: '향비' 의 에피소드는 이 블로그에 정리되어 있으므로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