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권 관현악단들 중 음반 제작에 적극적인 악단은 내가 아는 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수원시립교향악단 정도다. 물론 상업 음반 시장으로 가면 두 악단의 음반 시장 점유율이 아직 한참 미약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비매품으로까지 눈을 돌려 보면 이들이 제작한 음반의 가짓수는 의외로 다양한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악단이 음반을 안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경기도권 악단 중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CD를 낸 단체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껏해야 가곡이나 합창곡의 반주 앨범 같은 것이 조금 흔해 보이는 정도인데, 그 중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금난새 재임기에 낸 CD 하나를 꽤 운좋게 입수할 수 있었다.
황학동 중고음반점들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생각나고 시간날 때마다 종종 가서 눈팅하고 있지만, 청계천 건너서 띄엄띄엄 있는 헌책방들은 거의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있으려나 하고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허름한 바구니에 처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가격을 물어보니 딱 2000원이라고 해서 고민할 생각 없이 구입했다.
ⓟ 2010 Gyeonggi Philharmonic Orchestra / Seoul Media Co., Ltd.
겉보기에는 그냥 기존 음반들에서 이것저것 끌어다가 짜깁기해 만드는 흔한 컴필레이션 앨범처럼 보이는 물건인데, 비닐이 씌워져 있지 않아서 구입 전에 케이스를 열어 속지를 확인해볼 수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비매품 음반 치고는 녹음에 대한 정보가 꽤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기존 음반의 음원들을 갖다쓴 것이 아니라 2010년 1월 11~15일 닷새 동안 수원의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스튜디오 세션까지 마련해 제작한 물건이었다. 제작은 서울미디어라는 업체에서 했지만, 제작비 전액을 삼성테스코 산하의 홈플러스 e파란재단에서 부담해서 그런지 홈플러스 마크가 CD와 케이스, 속지 곳곳에 들어가 있다.
다만 이 CD는 시판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경기도 도내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 배포했던 비매품이었고(관련 기사), 35000장만 제작되어 서울 시민인 나는 그 존재도 모르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나마 이런저런 인터넷 중고음반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다가 검색에 걸려서 알게 되었는데, 비매품 치고는 이상하게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어서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2만원까지 값을 부르는 이들도 있을 정도니까.
그렇게 포기할까 했던 것을 거의 1/10 수준의 헐값에 살 수 있던 것이 요행이었는데, 일단 집에 와서 들어봤다. 여러 모로 금난새가 수원시향 상임을 맡고 있었을 적인 1994년에 삼성의 음반사업부였던 나이세스에서 제작한 비슷한 취지의 비매품 음반인 '체이스컬트 콘서트' 와 비교되는 물건이었는데, 음악만으로 채웠던 체이스컬트 CD와 달리 여기서는 몇몇 곡의 사이사이에 이런저런 캠페인 나레이션이 삽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캠페인까지 들을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없었고, wav 파일로 추출한 뒤 나레이션은 몽땅 들어내고 음악만 뽑아내 듣고 있다. 수록곡은 다음과 같다(괄호친 것은 나레이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오페레타 '박쥐' 서곡
안토닌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작품 72 제2번 E단조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 '봄의 소리'
(환경사랑 캠페인)
에드워드 엘가: 사랑의 인사 (관현악판)
요하네스 브람스: 헝가리 춤곡 제1번
안토닌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작품 46 제8번 G단조
프란츠 폰 주페: 음악 희극 '시인과 농부' 서곡
(지역사랑 캠페인)
요하네스 브람스: 헝가리 춤곡 제5번
에드워드 엘가: 위풍당당 행진곡 제1번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라데츠키 행진곡
(이웃사랑 캠페인)
프란츠 폰 주페: 오페레타 '경기병' 서곡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 중 알렐루야 (서활란 독창)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 지옥의 복수는 (서활란 독창)
(가족사랑 캠페인)
CD의 마지막을 흥겨운 음악이 아닌 복수의 아리아로 마무리한 것이 좀 이상했는데-물론 가사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화려하게 노래하는 걸로만 들리겠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쓰인 것은 음악의 여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캠페인 트랙으로 바로 넘어가도록 한 편집 방식이었다. 물론 차타고 다니며 가볍게 듣는 입장에서는 큰 흠결이 아니겠지만, 나는 이것도 용납할 수 없어서(??) 들어내버린 거였고.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그런거 없고 대부분 10분 이하의 롤리팝 선곡이라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헝가리 춤곡 5번과 경기병 서곡, 위풍당당 행진곡 1번, 라데츠키 행진곡 네 곡은 체이스컬트 콘서트 CD에도 있어서 둘을 비교하며 듣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었다. 시간차와 악단의 연주력 편차도 있어서 아무래도 경기필 연주가 음질로나 연주로나 더 세련되게 들리는 것은 당연했는데, 위풍당당 행진곡의 경우 그 유명한 중간부가 수원시향 시절보다 너무 빠른 것 같아서 체이스컬트 콘서트 쪽이 더 안정감있게 들렸다.
다만 이 CD의 드라이빙 뮤직 기능이 현실에서 얼마나 잘 발휘되었을 지는 조금 미심쩍다. 전공자나 웬만한 골수팬 아니면 차안에 클래식을 틀고 다니는 경우가 가뭄에 콩나듯 드문 한국의 현실에서, 그것도 자가용이 아닌 택시에서 이 CD가 정말 줄기차게 돌아갔는지가 궁금할 정도다. 물론 택시비도 버거워 거의 버스나 지하철만 이용하고 있고 면허도 없는 나로서는 드라이빙 뮤직 같은 목적은 아무래도 좋고, 한국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음반을 모은다는 목적을 또 하나 달성했으니 크게 불만은 없지만.
이 CD 발매 후 2년 여가 지난 지금은 또 이런저런 인사 이동이 있어서, 금난새는 인천시향으로 자리를 옮겼고 경기필은 구자범이 이끌고 있다. 다만 한국 지휘자들 중 가장 음반 제작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금난새와 달리, 구자범은 그 분야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경기필의 향후 음반 작업 계획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금난새 재임기에 만들어진 경기필 음반이 왠지 몇 장 더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음반 번호가 GPOC-1005라고 되어 있어서 1000~1004 번호가 붙은 다른 CD도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있어도 비매품일 테니 또 누군가가 어디서 매물로 내놓기를 기다려야 겠지만.
황학동 외에 요즘 이런 음반을 구하러 찾기 시작한 곳들이 아름다운 가게 산하의 헌책방 들인데, 서울 시내에 모두 다섯 군데가 영업하고 있다. 이 중 두 군데에서 구한 음반 두 종류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례로 써갈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