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세계의 화약고' 라고 불리는 지역은 지구상 어디에서든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한반도만 해도 남과 북으로 갈려서 한바탕 전쟁까지 한 뒤 지금도 무력 대치 상황이고, 지금도 뜸하다 싶으면 계속 해외 단신 등으로 올라와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혹은 여타 아랍 국가들 간의 분쟁도 그렇다.
특히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분쟁은 단순히 이념 같은 갈등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어서 쉽사리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죽하면 로이터 통신이 낸 관련 사진집 제목이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일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적어도 음악으로는 서로 대립 중인 두 지역과 인종을 화해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존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이스라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과 팔레스타인 태생의 미국 영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공동으로 만든 서동시집 관현악단(West-Eastern Divan Orchestra)인데, 이 악단은 바로 그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다큐멘터리 '엘 시스테마' 를 제작한 적이 있던 독일의 음악영화 전문 제작자이자 감독인 파울 슈마츠니(Paul Smaczny)는 이 서동시집 관현악단 프로젝트를 주제로 한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를 그보다 전에 발표한 바 있었다. 영어 원제는 'Knowledge is the Beginning', 직역해 보면 '아는 것이 시작이다' 라는 다큐였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유로아츠에서 해당 영화의 정점에 놓인 라말라 콘서트의 실황을 담은 DVD와 묶어 이미 발매한 바 있고 한국에도 정식 수입되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 공연의 실황만 바렌보임의 과거 소속사였던 텔덱에서 CD로 나온 것을 들었을 뿐이고, 다큐멘터리는 아직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비록 몇 개 개봉관에 한해서지만 한국 개봉이 되었다는 소식을 9월 중순에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한 번 가서 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간 개봉관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이 영화를 내건 아트선재센터 지하에 있는 씨네코드 선재였다. 물론 부산, 대구, 대전에서도 각기 한 개씩의 개봉관만 잡았기 때문에 딱히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원제를 그대로 쓰면 왠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는지, 저렇게 제목을 바꾸어 내걸고 있었다.
물론 '엘 시스테마' 때도 비슷했지만, 관람률은 비교적 저조해 보였다. 게다가 DVD로 이미 나온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랬겠고. 하지만 나처럼 한글 자막이 없는 수입품 DVD보다는 (오역 등이 걱정되기는 했어도) 정식 개봉 영화로 보는게 좀 더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영화는 초반부에 바렌보임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 지역을 답사하는 장면을 제하면,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창단 때부터 라말라 공연 까지의 궤적을 시간 순서대로 쭉 따라가고 있었다. 독일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워크숍과 리허설을 거쳐 악단이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연주하는 장면이 대략 초반부, 악단의 거점을 독일에서 에스파냐의 세비야로 옮겨 주네브에서 공연하는 장면이 담긴 대목이 중반부, 그리고 라말라 공연 준비와 공연 후를 담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었다.
바렌보임은 작중에서 '나는 음악인일 뿐이고, 정치에 대해 관심은 없다' 고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더 고차원적인 정치이자 역설이다. 바이마르에서 시작했을 때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단순한 음악 연습과 연주 외에도 거기서 가까운 나치 시절의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로 가서 유대인 학살에 대해 의논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현재의 이스라엘-아랍 분쟁과 연관시킨 강연도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단원이나 여타 아랍 국가들의 아랍인 단원들의 의견 차가 발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그 의견차를 좁히거나 일치시키지는 못할 지언정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결국 이 분쟁의 해결에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견해였다.
다만 사이드는 이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중인 2003년에 백혈병으로 타계했기 때문에, 대략 주네브 콘서트 이후로는 주로 바렌보임과 악단의 활동상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들 중 하나도 이 때부터 나오는데, 바렌보임이 단신으로 팔레스타인의 어느 학교 강당을 방문해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거나 창단된 지 얼마 안된 학생 관현악단과 대면하는 장면들이다.
비록 초라한 강당에서 연 리사이틀이자 공연이지만,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비무장한 유대인이 맨몸으로 와서 음악을 들려주는 모습에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공연했으니 유대인 정착촌에서도 공연할 계획은 없는가' 라는 이스라엘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무력을 행사해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있으므로 그럴 생각이 없다' 고 돌직구 식의 답변을 하는 모습에서 상당한 '깡' 도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바렌보임과 강경파 유대인들 사이의 대립은 특히 2004년의 볼프 상 수상식을 담은 장면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데, 수상 소감에서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독립 선언문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행하고 있는 무력 분쟁이 그릇된 것임을 주장했다. 그러자 볼프 상 자문위원 중 한 사람이 나치 강제수용소의 악명높은 문장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롭게 한다)' 를 비튼 'Musik macht frei(음악이 자유롭게 한다)' 를 적은 쪽지를 들어 항의를 표하고, 이스라엘 교육부 장관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모습이 나온다.
뒤이어 바렌보임이 세비야에서 리허설을 가진 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공연하려고 한다' 고 단원들에게 알리고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는 장면에서도 갈등 양상이 포착된다. 다만 공연을 반대하는 이들도 단순히 '이스라엘이 싫어서', 혹은 '팔레스타인이 싫어서' 라는 식의 이유 보다는 안전이나 보안 상의 문제, 부모들과의 견해차 등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들고 있다.
하지만 바렌보임과 악단 관계자들은 이들에게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에스파냐 정부까지 나서서 단원들에게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보증을 서는 보기 드문 모습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동 상의 문제 때문에 유대인 단원들은 이스라엘로 간 뒤 거기서 팔레스타인으로, 아랍인 단원들은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다소 번거로운 이동 경로를 택해야 했다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라말라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지만, 유대인 단원들은 여전히 보안 상의 문제로 공연장인 라말라 문화궁전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곧장 외교관들의 관용차를 타고 팔레스타인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했다. 공연에서는 화합이 이루어졌지만 현실에서는 결국 감동을 나눌 겨를도 없이 서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모습에서 약간의 씁쓰레함이 느껴진다.
다만 이렇게 해서 적어도 서동시집 관현악단에서 연주한 단원들은 음악으로나마 서로가 소통하고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아직은 막연하지만 무력에 의한 공격과 보복 외에 양대 진영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언젠가 열릴 것이라는 자그마한 희망 정도는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악단의 활동상이 항상 장밋빛 미래로만 가득한 것도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난 뒤인 2006년에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레오노레 서곡 3번과 교향곡 9번으로 공연을 했을 때도 때마침 악화되고 있던 중동 정세 때문에 몇몇 단원들이 연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2011년 8월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으로 내한 공연을 했을 때는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엇갈리는 등 음악적인 수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창단된 지 아직 10년 좀 넘은 정도의 짧은 연륜을 갖고 있고, 단원들이 지속적으로 교체되는 청소년 관현악단이라 정연한 합주력과 표현력을 상시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태생적인 한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처럼 그 한계를 가능한한 극복하고 메이저 무대에 진출하고 있는 사례에서 보듯이, 이 악단이 정치적 쇼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견해를 극복할 가능성은 아직 있다고 본다.
한국어 자막은 이 다큐가 공식 개봉되기 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의 것을 그대로 쓴 것 같은데, 치명적인 오류는 없던 것 같지만 영어 자막을 중역하고 독일어에 대한 이해가 약간 부족했는지 부헨발트를 부켄발트로 표기하는 등의 사소한 결점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국제적인 배경에서 만든 다큐고, 영어와 독일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의 인터뷰와 대화가 난무하는 영화인 만큼 이런 자막 상영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귀중한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뒤 그 동안 살까 말까 하고 고민 중이던 이 악단의 잘츠부르크 실황이 담긴 데카의 CD를 구입했다. 사실 이 실황은 이 다큐를 제작한 유로아츠에서 DVD/BD로 만들어 발매하고 있지만, 몇몇 청중들이 공연 중 실수로 친 박수가 거슬려서 차라리 CD가 듣기에는 더 편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CD에서는 어느 정도 편집을 했는지 모든 박수 소리가 제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 다큐멘터리의 개봉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베토벤 교향곡 전집 앨범도 국내에 수입되었는데, 한국 공연을 가진 직후인 2011년 8월 하순에 쾰른에서 개최한 전곡 연주회 실황으로 제작된 음반이라고 한다. 물론 한국 공연 때 나온 엇갈린 평도 있고, 이미 베토벤 교향곡 전곡 음반이라면 푸르트벵글러와 서현석의 것을 갖추고 있어서 중복 구입에 따른 우려도 있어서 좀 주저하고 있지만.
다만 요즘에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음반처럼 실황이라도 공연 직전에 리허설을 녹음하거나 사전 세션을 진행하고 있고, 둘을 섞는 편집을 통해 어느 정도 일관된 음질과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그러니 한국 공연 때처럼 중간에 연주를 끊고 다시 시작하거나, 악장 사이에 터져나오는 박수 등 감상에 방해를 받을 수 있는 요인은 거의 제거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