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개판으로 만든 희대의 극우 집단이라는 것이 나치라는 집단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그 개판으로 만든 방법이 어떠했는 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 쪽에서는 전제 정치의 수단을 그대로 갖고와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방식으로 그랬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최신 기술과 교묘한 술책으로 국민을 기만한 (나쁜 의미의) 엘리트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멀리서 보자면 저 두 가지가 모두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 돌격대(SA) 같은 나치 초기의 그야말로 정치깡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집단이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같은 꼴통스러운 나치 인종 이론가들이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고, 후자의 경우 그 방향성을 떠나 선전선동 전술의 전문가였다고 하면 대부분 인정하는 요제프 괴벨스라던가 군수 산업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독일의 패망을 늦췄다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나치 엘리트의 한 축으로 다뤄질 수 있을 듯 하다.
나치의 음악 정책에서도 이런 파벌들이 권력 투쟁처럼 밀고 당기기를 시도하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이런저런 논문이나 관련 음악학 서적을 보면서 이 양상이 꽤 복잡하고 때로는 일관성 없게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어느 예술이든 나치가 원론으로 제시한 '독일적', '아리아적' 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라고 하면 누가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을까.
전공인 클래식 분야에서는 나치 음악 정책에 관한 수많은 주장과 논문을 읽어볼 수 있었지만, 나치가 소위 '대중음악' 분야를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해서 알아본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뤄진 결과물을 귀로 듣게 된 것은 불과 몇 주 전이었고.
나치 시기 독일에서 창작된 음악들은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중에 애당초 정치/군사적 목적을 지니고 창작된 음악은 군가라던가 나치와 직접 관계되는 이념이 담긴 정치 가요를 제외하면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음악을 방송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라디오에서도 이런 음악이 방송되는 횟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정치적이지 않은 음악이라고 해서 나치가 결코 가치를 폄하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오히려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의 선전선동 전문가들은 이런 음악을 통해 '우리 나치는 결코 무식하게 정치만 외치는 집단이 아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지원할 줄 아는 고상함도 갖추고 있다' 고 어필할 수 있었다. 그리고 2차대전을 일으키면서 자멸의 길을 향하고 있을 때도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서 국민들에게 '마약을 투약하듯이' 감미로운 음악을 계속 내보내면서 '그러니 우리는 음악의 나라 독일을 지켜야 한다' 는 무언의 압박도 가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독일 거장들의 공연 실황이나 방송 녹음이 온갖 음반사에서 CD나 여타 다운로드 음원으로 사골 마냥 울궈지고 있지만, 의외로 당시 나치의 제국 방송에서 클래식이 차지한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아예 클래식을 주로 다룬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도이칠란트젠더(Deutschlandsender) 같은 방송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국 방송국 지국들에서는 독일 민요라던가 오페레타, 그리고 요즘은 슐라거(Schlager)라고 통칭하는 가벼운 대중음악이 방송의 주가 되었다.
민요나 오페레타는 넓게 보면 클래식에 영향을 주었거나 그것을 근간으로 탄생한 음악이었기 때문에 나치 입장에서는 이용해 먹기 쉬웠지만, 미국을 통해 들여온 블루스나 재즈의 어법을 절충하는 경우가 많았던 슐라거의 경우가 좀 복잡했다. 나치는 집권 초기 강한 인종주의를 설파하면서 블루스와 재즈를 '열등한 깜둥이가 빚어내는 혼돈과 저속의 소음' 이라고 깎아내릴 정도로 공개적인 거부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그 거부감을 선전선동 전술로 '승화' 시키려던 나치는 극도의 어설픔을 감추지 못했다. 왜 재즈와 블루스가 나쁜 가에 대해 그들이 이성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없었고, 되레 이들 음악에서 많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색소폰이 도매금으로 평가절하 당하는 등 부작용만 컸다. 그러자 나치는 색소폰에 한해 '이 악기는 아리아인 아돌프 작스가 만들었고, 그저 흑인과 유대인의 희생양이었을 뿐' 이라고 급히 물타기를 시도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재즈/블루스를 저급 음악이라고 신나게 까도, 여전히 그런 음악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확보되고 있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적어도 전쟁 전까지는) 나치가 재즈 방송을 금지하든 어쩌든 계속 음반을 구입해 들을 수 있었고, 재즈 밴드들도 여전히 대도시의 클럽이나 카바레 등지에서 계속 연주를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재즈 음악 금지 시도가 별로 씨알이 안먹힌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나치 선전성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대안' 을 내놓기 시작했다. 재즈의 해악이 저속한 리듬과 분위기-흔히 스윙감이라고 하는-에 있다고 하면서 그 둘을 의도적으로 죽여 연주하는 음악을 '신독일 무도음악(Neue deutsche Tanzmusik)' 이라고 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신독일 무도음악을 위해 나치는 특별한 편성의 밴드를 시도했다. 일단 정통적인 재즈 앙상블의 틀은 그대로 가져오되, 거기에 바이올린 등의 찰현악기를 많이 가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밴드의 관악 주자들(혼 섹션)이나 피아노, 드럼, 기타, 콘트라베이스 등 리듬악기 주자들(리듬 섹션)에게는 '너무 뜨겁고 리드미컬하게 연주하지 마라' 는 주의를 계속 주었다. 이렇게 해서 빅 밴드의 약화된 음향에 현악기의 유려한 음향을 섞은 것이 신독일 무도음악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당시 재즈의 중요한 요소였던 스윙을 거세하려고 했으니, 사람들이 이 음악을 유약하거나 지나치게 부드럽다고 생각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치는 계속해서 정책적으로 이런 형태의 '순화된 재즈 밴드' 를 나치 대중음악의 뿌리로 만드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첫 관제 악단이 1934년 말에 조직된 '황금의 7인(Die Goldene Sieben)' 이라는 7인조 악단이었다.
저 악단은 나치 당원이기도 했던 피아니스트 빌리 슈테히(Willi Stech)와 독일-폴란드계 미국인으로 독일에서 음악을 배운 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하롤드 M. 키르히슈타인(Harold M. Kirchstein)이 공동으로 조직했는데, 나치의 후원을 받아 베를린의 여러 무도회장과 카페 전속 밴드에서 실력이 좋은 연주자들이었던 아달베르트 루츠코프스키(Adalbert Luczkowski, 바이올린), 쿠르트 호엔베르거(Kurt Hohenberger, 트럼펫), 프란츠 톤(Franz Thon, 클라리넷/색소폰), 빌리 베르킹(Willi Berking, 트롬본), 한스 분트(Hans Bund, 피아노), 프리츠 '프레디' 브로크지퍼(Fritz "Freddie" Broksieper, 드럼) 등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이렇게 영입한 연주자들은 물론 유능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수 년에서 십수 년 까지 오랫동안 연주한 재즈의 스윙감을 하루 아침에 쉽게 벗어던지지 못했다. 오히려 나치가 자꾸 연주 스타일과 공연 레퍼토리 등 모든 것을 간섭하려고 하자 숱한 탈퇴와 영입이 반복되었고, 급기야 1935년 여름에 이들이 처음 방송을 탔던 도이칠란트젠더에서 일시적으로 퇴출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창단자 중 한 사람이었던 키르히슈타인은 이런 등쌀에 못이겼는지 1937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거기서 헨리 르네라는 예명의 밴드 리더이자 음악 프로듀서로 제 갈 길을 갔다.
이 때문에 황금의 7인이 방송용으로 제작한 녹음은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밴드들처럼 주로 상업용 음반 제작이 활동의 주가 되었다. 다만 나치가 이들의 녹음을 방송에서 완전히 퇴출시킨 것은 아니었고, 1938년 5월 21일에 도이칠란트젠더에서 방송한 음악 프로그램 '수천의 경쾌한 음표(Tausend muntere Noten)' 에서 연주한 방송 녹음 등 얼마 간의 녹음 자료가 존재한다.
저 프로그램의 녹음을 아나운서의 멘트까지 생략 없이 몽땅 수록한 음반이 독일 음반사 유베(Jube)에서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의 음원을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발견하고 들어볼 수 있었다. (음반 번호 JUBE1602. 이후 언급되는 음반들도 대부분 해당 사이트에서 들었던 것들이다.)
ⓟ 2001 JUBE Musikproduktion
영국 방송까지 염두에 뒀는지 아나운서의 유창한 영어가 섞인 인사로 시작한 저 프로그램에서는 이 황금의 7인을 비롯해 여러 음악인들이 공동 출연했다. 그 중 피아노 반주를 동반한 남성 5중창단 '다스 마이스터젝스테트(Das Meistersextett)' 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1928년 결성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코메디언 하모니스츠(Comedian Harmonists)' 가 1935년에 나치에 의해 강제 해산된 뒤 선전성의 관제 중창단으로 재조직된 보컬 그룹이었다. 여기에 이런저런 보컬리스트와 연주자, 그리고 도이칠란트젠더 전속 관현악단이었던 도이칠란트젠더 대관현악단까지 게오르크 헨셸과 칼 리스트의 공동 지휘로 가세했다.
연주된 곡들은 황금의 7인의 재즈 연주부터 마이스터젝스테트의 가요 중창, 관현악단의 클래식 소품, 그리고 황금의 7인과 관현악단의 합동 연주까지 다양했는데, 황금의 7인이 가장 자주 출연하면서 방송의 중심 격으로 부각되어 있다. 그 만큼 이 방송에서 저 악단을 국내외에 신독일 무도음악의 총아로 내세우려고 애를 쓴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치의 선전선동 전문가들은 1939년에 이 밴드를 공식적으로 해체해 버렸는데, 그렇게 해서 재즈를 멋대로 다루려던 첫 시도가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괴벨스는 재즈를 독일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황금의 7인으로 얻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음악을 정치적으로 계속 밀어주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