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치 이전에도 독일의 라디오 방송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달리 높았다. 히틀러가 제국 총리가 되면서 공식적인 실권을 잡은 직후에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선전하려고 정치 집회 중계나 강연회 연설 실황 혹은 녹음 방송의 비중을 일시적으로 높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음악 방송의 비중은 제국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에서 과반이 훨씬 넘는 7/10까지 늘어났다.
이런 음악 방송의 대폭 지원은 괴벨스가 의도한 일종의 '우민화 정책'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괴벨스는 일반 시민들이 정치가가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식의 방송을 지루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고, 선전 방송을 최소한의 비중으로 줄이되 요점은 확실히 전달하도록 '짧고 굵게' 제작하고 나머지는 그들이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현실을 잊게끔 하는 다양한 음악으로 채운다는 식의 전략이었다.
나치 제국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은 기성 음반을 그대로 틀어주는 식의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각 방송국 별로 배치되어 있던 전속 악단이 참가하거나 그 지방의 음악인을 기용해 녹음한 실황 혹은 그에 준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이런 방송국별 예술단 체제는 2차대전 뒤에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나치 집권 이전인 1925년에 출범한 독일 공영 방송의 총괄 조직인 제국 방송 협회(Reichs-Rundfunk-Gesellschaft. 이하 RRG)는 독립성 강한 지방 방송국들의 다소 느슨한 모임이었지만, 나치 집권 후 선전성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베를린의 본부가 휘하 지국을 총괄하는 국영 관제 단체로 바뀌었다.
1933년 당시 RRG는 베를린을 포함해 라이프치히(중부독일), 쾰른(서부독일), 함부르크(북부독일), 슈투트가르트(남부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남서독일), 브레슬라우(슐레지엔), 쾨니히스베르크(동프로이센), 뮌헨(바이에른)에 지국을 갖고 있었고, 각 지국에서는 전속 합창단과 관현악단, 경음악단을 두고 있었다.
이 중 경음악단이 재즈/블루스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는데, 다만 재즈를 대놓고 씹던 나치의 간섭 때문에 이들 악단은 재즈나 그와 관계된 단어인 스윙, 빅 밴드 등을 명칭에 직접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 지국 별로 저마다 탄츠오케스터(Tanzorchester), 카펠레(Kapelle), 탄츠카펠레(Tanzkapelle), 클라이네스 오케스터(Kleines Orchester) 등의 명칭을 대신 사용했다. 어느 단어나 일반적인 클래식 관현악단보다 소편성이고 무도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악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고, 그 무도음악의 밑바탕 중 하나가 빅 밴드의 스윙이었다.
하지만 나치는 결국 1930년대 중반부터 이들 방송국 경음악단에도 강한 간섭을 가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단원들이 해고된 것은 물론이고, 음악에서 스윙 색을 뺄 것과 미국과 영국 등 영어권 스탠더드 연주의 비중을 줄이라는 강요도 계속되었다. 물론 지국 별로 밴드의 편성과 성향은 조금씩 달랐고 이미 나치가 요구한 그것처럼 현악기를 같이 편성한 악단도 있었지만, 어느 악단이든 이제 흥겨운 스윙을 공식적으로 자제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방송 활동 금지와 허용이 밥먹듯이 반복된 황금의 7인과 달리, 이들 방송국 전속 경음악단은 애초에 방송 전용으로 결성된 만큼 훨씬 많은 녹음 자료가 남아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나치의 마음에 들지 않아 강제 폐기되거나 전쟁 중에 방송국이 폭격으로 파괴 또는 전소되어 유실된 것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들 중 독일 음반사 유베에서 슈투트가르트와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의 RRG 지국 소속 경음악단이 1937~38년에 방송용으로 녹음한 음원들을 골라 한 장의 CD로 묶은 것을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들어보았다(음반 번호 Jube-NML1041).
ⓟ 2001 JUBE Musikproduktion
슈투트가르트 제국방송 소관현악단(Kleines Orchester des Reichssenders Stuttgart)은 바이올리니스트 빌리 바라(Willi Bara)가 지휘했는데, 생몰년도를 포함해 상세한 이력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프랑크푸르트 제국방송 소관현악단(Kleines Orchester des Reichssenders Frankfurt)을 지휘한 색소포니스트 프란츠 하우크(Franz Hauck)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프랑크푸르트 지국 전속으로 나름대로 유명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쿼텟(4중주단)을 이끌기도 했다고 한다.
함부르크 제국방송 무도악단(Tanzkapelle des Reichssenders Hamburg)의 지휘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얀 호프만(Jan Hoffmann)은 함부르크에서 오랫동안 트로카데로 댄스바 전속이었던 자신의 밴드를 이끌다가 1938년에 이 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종전 후에도 비슷한 편성의 경음악단을 이끌었다고 한다.
베를린의 도이칠란트젠더는 에어빈 슈타인바허(Erwin Steinbacher)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악단(Kapelle Erwin Steinbacher)을 전속 경음악단으로 두고 있었다. 슈타인바허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색소폰 등 여러 악기를 연주했고, 자신의 악단을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이끌면서 방송 출연과 음반 녹음 활동을 했다. 전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출판사와 빅 밴드를 이끌며 독일 재즈계에서 활약했다.
이들 악단이 나치 집권기 이전에도 존재했는지, 또 존재했다면 어떤 음악을 들려줬는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녹음들에서는 확실히 나치가 재즈를 그들 입장에서는 '독일화' 하려고, 또 나같은 입장에서는 '망가뜨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 지를 알 수가 있었다.
스윙 색을 가능한한 죽이겠다는 괴벨스의 의도에 따라 장단은 밍숭맹숭하게 희석되어 있고 색소폰과 트럼펫, 트롬본의 혼 섹션은 부드러운 음색의 현악기와 휘감겨 감미로운 멜로디를 뽑아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녹음된 곡들 중에는 슈투트가르트 악단이 연주한 지미 맥휴 같은 미국 작곡가의 스탠더드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독일 혹은 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이고 영화음악이나 오페레타, 가요를 편곡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미국식 스윙 재즈의 강렬한 맛은 상당히 희석될 수밖에 없어졌고, 그냥 일반적인 당시의 독일 대중음악에 재즈나 블루스의 느낌을 '약간 가미한' 무드 음악 혹은 이지 리스닝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몇몇 학자들이 아예 유사 재즈(pseudo-jazz)라고까지 격하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는데, 아마 이 때문에 당시 젊은이들이 이렇게 밍밍하게 변해버린 독일식 재즈 대신 미국의 재즈 레코드를 구하려고 기를 썼을 것 같다.
그나마 이런 전쟁 이전의 경음악단 음원에서는 나치의 제재를 무릅쓰고, 혹은 자신들의 음악적 본성을 무의식 중에 계속 보여주는 모습이 종종 나오고 있어서 '이게 그래도 재즈 맛이 좀 나긴 하네' 라는 생각이라도 들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정치적 술수와 협박으로 집어삼킨 뒤 기어코 폴란드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키자 이런 시도 자체도 점차 위험해지게 되었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