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선전 효과를 노리고 무료 배포까지 한 라디오 수신기의 성능이 워낙 좋았던 탓에, 아직도 사람들은 들키지 않겠다거나 처벌까지 감수할 마음만 먹으면 적국 방송을 선명한 음질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적국 방송에서는 이제 독일에서 듣기 힘들어진 '원조' 미국산 재즈 역시 방송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괴벨스 등 나치의 선전선동 전문가들은 '아오 이 놈들 적국 방송 안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라는 고민을 떠안아야 했고, 특히 '그 빌어먹을 재즈를 찾는 사람들' 을 어떻게 구슬러야 할 지도 비슷한 맥락에서 풀기 힘든 숙제였다. 게다가 숙적 영국을 깨부수려고 시작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수많은 전투기와 폭격기, 숙련된 조종사를 잃고 깨갱대면서, 또 1941년 6월에는 그 동안 독일의 군수물자 셔틀 역할을 해주던 소련을 공격하는 허세 쩌는 짓을 시작하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나치 선전성의 고위 간부들은 자신들이 시도한 재즈의 독일화, 공식적으로는 '신독일 무도음악' 이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즈 자체를 인정하자니 자신들의 인종 이론과 정면으로 모순되었고, 또 이제는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도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적국이 되었으니 정치/군사적으로도 용인될 수 없었다.
결국 나치는 계속 신독일 무도음악을 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 각 방송국이나 사설 악단의 관제화 같은 (자신들 입장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탈피해 국가 주도의 악단을 하나 창설하게 되었다. 1941년 하반기에 제국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음악 방송을 포함한 연예/오락 방송의 비중이 더욱 늘어났고, 이들 프로그램을 위해 10월 23일에 '독일 무도오락악단(Deutsches Tanz- und Unterhaltungsorchester)' 이라는 대규모 악단을 조직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였고 나치 당원이기도 했던 프란츠 그로테(Franz Grothe)가 선전성의 의뢰로 조직한 이 악단은 나치의 신독일 무도음악을 위한 밴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바이올린 주자 열두 명과 비올라 주자 네 명이 현악 앙상블을 이루었고, 거기에 색소폰 네 대와 트럼펫 세 대, 트롬본 세 대가 혼 섹션을,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이 리듬 섹션을 이루는 혼합 편성이었다.
고전적인 빅 밴드의 혼 섹션 편성이 색소폰 5-트럼펫 4-트롬본 4로 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각 악기 숫자를 하나씩 줄이고 반대로 현악 그룹을 키워놓은 것에서 그 의도가 매우 명백했다. 날카롭고 뜨거운 재즈의 맛을 더욱 줄이고 현악기의 유려한 음색을 더욱 강조하겠다는 것이었고, 특정 연주곡이나 기회에 따라 증편된다고 해도 이 비율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멤버 구성과 연주곡에 있어서도 괴벨스는 '독일적' 혹은 '아리아적' 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려고 했다. 덕분에 창단 시점의 멤버 중 외국인 단원은 단 한 명 뿐이었고, 그 역시 뉘른베르크 순혈법에 따라 순혈 아리아인으로 분류된 인물이었다. 연주곡도 미국 재즈를 어느 정도 섞어 연주하던 다른 악단과 달리 여기서는 독일인 작곡가, 그리고 최대한 여유있게 잡아도 유럽의 아리아인 작곡가들이 쓴 음악만을 연주했다.
창단자 그로테 외에 '황금의 7인' 과도 관계가 있던 게오르크 헨셸(Georg Haentzschel)이 공동 리더로 영입되어 악단의 레퍼토리 편곡과 지휘를 맡았고, 여기에 호르스트 쿠드리츠키(Horst Kudritzki)가 부지휘자 겸 편곡자로 추가 영입되어 악단 활동의 모든 기반이 갖춰졌다. 괴벨스의 지시로 100만 제국마르크의 거금이 악단 운영비로 투입되는 등 재정 지원도 빵빵했고, 한 술 더 떠 단원들은 모두 군 복무를 면제받는 추가 혜택까지 누렸다.
이 군 면제 혜택은 어지간히 나치와 연줄과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나 단체가 아니면 누리지 못한 것이라는 점에서, 괴벨스가 얼마나 작정하고 이 악단을 밀어주려고 했을 지 짐작할 수 있다. 독일 무도오락악단은 이듬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들에게 부과된 주 임무인 방송 녹음에 착수했고, 베를린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수십 장의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자신들의 연주를 수록했다. 이 작업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 이어졌고, 베를린이 연합군의 폭격기로부터 안전하지 못하게 되자 프라하의 제국 방송국 지국으로 옮겨가 종전 직전까지 계속 활동했다.
1942~45년 동안 제작된 녹음들은 독일 통일 후 모노폴(Monopol)이라는 음반사에서 여섯 장의 CD로 묶여 출반되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 수입되지 않아서 들어보지 못하고 있다. 다만 마찬가지로 유베(Jube)에서 다른 악단과 섞은 것이기는 하지만 한 장의 CD를 내놓은 것이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서비스되고 있어서 그걸로 들어보았다(음반 번호 Jube-NML1040).
이 악단의 거창한 편성과 활동 취지를 반영했는지 음반 제목을 'Swing-Sinfonie(스윙 교향곡)' 라고 거창하게 달아놓았는데, 실제로 방법론만 따져 보면 20세기 초반에 폴 화이트맨 같은 백인 밴드 리더들이 시도한 심포닉 재즈와 맥락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화이트맨은 적어도 자신의 음악에서 스윙을 거세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고,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 를 세상에 처음 소개한 악단으로 역사적인 이름이라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 악단은 스윙감을 억지로 거세당한 음악적 한계에, 레퍼토리도 독일 바깥에서는 생소한 것들 위주로 공연하고 녹음해야 하는 정치적 한계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음악사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실제로 들어보았을 때도 너무 밋밋하고 부드럽기만 해서, 심지어 1950~60년대에 미국에서 유행한 재즈 뮤지션과 현악 앙상블의 협연 음반보다도 지루하게 들렸다.
이렇게 그들이 원하던 음악이 나온 것 같았지만, 괴벨스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은 것 같다. 계속 악단과 지휘자들에게 리듬과 열기를 빼고 연주하라고 강요했고, 1944년 2월에는 그로테와 헨셸을 악단 지휘자에서 해임하고 빌리 슈테히(Willi Stech)와 버르너바스 폰 게치(Barnabás von Géczy)를 후임으로 영입했다. 명목상으로는 그로테와 헨셸이 영화음악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퇴임했다고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음악을 너무 재즈 친화적으로 이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미 실패한 시도였던 '황금의 7인' 을 창단한 바 있었던 슈테히는 그로테와 마찬가지로 나치 당원이었고, 좀 더 나치 순응적이었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치는 우방국인 헝가리 출신으로 아예 재즈와는 별로 상관 없는 세미 클래식-이지 리스닝 영역에서 활동하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이런 점에서 괴벨스가 이 악단에서 재즈의 자욱을 말살하기 위해 얼마나 깊숙히 개입했는 지를 알 수 있다. 아직 리더 교체 후의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 전인 1942~43년에도 이렇게 맹맹한 음악을 연주했다면 그 이후에 음악적인 매력이 얼마나 남아있을 지도 무척 회의적이다.
유베에서 낸 CD에는 독일 무도오락악단 외에 이후 그 악단을 넘겨받게 되는 슈테히가 이끌던 도이칠란트젠더 무도악단(Tanzorchester des Deutschlandsenders)의 같은 시기 녹음도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 이 악단의 녹음만 수록한 CD도 있다(음반 번호 Jube-NML1039).
괴벨스가 독일 무도오락악단의 지휘자로 위촉한 인물이었으니, 그가 이끌던 저 무도악단도 마찬가지로 밍숭맹숭한 음악을 연주하는 그저 그런 밴드였다고 쉽게 유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들어본 바로는 오히려 독일 무도오락악단보다는 좀 더 스윙감이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무도악단도 마찬가지로 현악기를 대거 투입해 음색이 지나치게 유화되어 버렸다는 태생적 문제 자체는 벗어날 수 없었다.
다만 레퍼토리에도 한계가 있던 독일 무도오락악단과 달리, 도이칠란트젠더 무도악단은 패전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 1942~43년에도 여전히 적국 미국의 음악을 방송에서 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CD에 리처드 로저스의 Where or When이나 아이샴 존스의 On the Alamo, 지그먼드 롬버그의 Lover, Come Back to Me, 호기 카마이클의 Stardust 같은 재즈 스탠더드들이 들어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저들 중 로저스와 롬버그는 나치 인종법으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유대인 작곡가였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저들 음악을 유대인, 더군다나 적국의 유대인이 썼다고 당당히 소개할 수는 없었을 테니 작곡자를 언급하지 않고 제목도 독일어로 바꿔서 소개하는 식으로 스리슬쩍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또는 저 녹음들을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소개할 대영 선전 방송용으로 특별히 (그리고 비밀리에) 제작했을 수도 있겠고.
하지만 도이칠란트젠더 무도악단은 1944년 초 괴벨스의 국민 총동원령에 따라 해산되었고, 저 악단을 이끌던 슈테히는 곧 독일 무도오락악단의 지휘자로 옮겨갔다. 그리고 독일 무도오락악단도 제국 관현악단 자격 때문에 여차저차해서 전쟁 최후반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지만, 결국 패전 후 연합군에 의해 강제 해산의 수순을 밟아야만 했다.
나치 관제 악단이었으니 단원들도 매우 강도높은 처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물론 전쟁의 마지막 며칠 동안 프라하 방송국을 공격해 점령한 체코의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일부가 살해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체포 후 '우린 그냥 음악가였지 정치인이 아니었다' 는 흔한 변명을 붙여 미미한 처벌만 받고 풀려나 전후에도 계속 독일 대중음악계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이어갔다.
실제로 이들이 연주한 음악 자체는 거의 대부분 그냥 일반 대중들을 위해 작곡된 여흥 음악일 뿐이라, 녹음 자체는 무해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음반으로, 또 디지털 다운로드 음원으로 판매되고 보급되고 있을 수 있겠고. 다만 이들이 과연 음악만 했으니 죄가 없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냐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괴벨스가 마련해준 높은 액수의 봉급으로 다른 음악인들보다 안정된 생활 수준을 누렸고, 또 병역 면제 같은 공적인 특혜까지 누리며 나치의 음악 정책에 이바지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정치적 행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단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들보다 더한 시도를 한 악단에 나는 음악적으로도 절대 면죄부를 줄 수가 없다. 그 문제의 악단에 대해서는 역시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