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Title](https://tistory1.daumcdn.net/tistory/297605/skin/images/icon_post_title.gif)
하지만 선전 효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나치 이념도 어느 정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여긴 괴벨스는 자기 자신조차 싫어했던 정통 재즈 음악의 연주를 어느 밴드에게만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물론 그 허용에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는 것도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겨냥한 대북방송을, 그리고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겨냥한 대남/대미방송을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 중에도 추축국이든 연합국이든 모두 정치/군사적 목적의 선전 방송 제작과 송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의 경우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선전 방송에 촛점을 맞췄다.
이들 선전 방송은 공식적으로 Germany Calling(대영방송)과 Midge at the Mike(대미방송)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현재 저 방송들을 기억하게 하는 단어는 모두 저 방송이 노린 적들로부터 나온 멸칭인 Lord Haw-Haw(호호 경)와 Axis Sally(추축 샐리)였다. 그리고 독일이 패망한 뒤, 저 방송들의 아나운서로 악명을 떨친 윌리엄 조이스와 밀드레드 질라스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각각 교수형과 10~30년 징역형이라는 중형에 처해졌다.
전쟁 후반에는 물론 그 동안 독일군과 친위대가 저지른 전쟁 범죄의 댓가로 가차 없이 보복을 가했던 소련이 가장 공포스러운 적이었지만, 초반과 중반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신나게 씹어댄 주적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두 국가 모두 1차대전에서 독일을 쳐발라버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괴벨스는 독일 국민들에게는 이들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영국과 미국 국민들에게는 그들의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어 민심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선전 정책을 밀고 나갔다.
특히 괴벨스는 재즈의 역할과 영향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국 만큼은 아니더라도 영국에서도 재즈를 즐겨듣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고, 독일을 겨냥해 영국의 BBC에서 보내는 선전 방송에도 물론 재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BBC가 재즈로 독일인들에게 선전 효과를 배가시키려고 한다면, 자신들도 못할 게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괴벨스의 속내야 모르지만, 그는 1940년에 윌리엄 조이스에게 대영방송의 진행을 맡김과 거의 동시에 뒤셀도르프 출신의 색소폰 주자 루츠 템펠린(Lutz Tempelin)에게 대영방송의 재즈 연주를 전담할 전속 비밀 밴드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템펠린 휘하에 모인 연주자들 중에는 '황금의 7인' 에서도 활동한 바 있던 트롬보니스트 빌리 베르킹과 드러머 프리츠 브로크지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비밀 밴드에 괴벨스는 보컬리스트를 전속으로 붙여줬는데, 기악 위주로만 연주하던 다른 독일 밴드들과 달리 가사가 있는 음악이 구체적인 선전 효과를 배가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반영한 술책이었다. 보컬리스트의 이름은 칼 슈베들러(Karl Schwedler)였고, 괴벨스의 선전성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본명은 여타 밴드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방송에서 일체 언급되지 않았고, 다만 칼을 영어 애칭 식으로 읽은 '찰리' 로만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 애칭이 밴드 명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선전용 비밀 재즈 밴드 '찰리와 그의 악단(Charlie and his Orchestra)' 이 창단되었다.
찰리와 그의 악단은 곧 진행자 조이스와 함께 대영방송의 '스타' 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이들은 현악기를 우격다짐으로 추가하거나 스윙을 끊임없이 제지당하던 여타 독일 '공식' 밴드들과 달리 나치 집권 전에 연주된 '몸이 동하게 뜨겁고 흥겨운 리듬의' 정통 미국식 재즈를 선보였고, 이것이 도버 해협 건너 영국 청취자들에게 묘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가장 큰 흥미는 밴드의 음악 보다는 이들이 연주한 곡에 수반된 노래에서 나왔다.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면 이내 '찰리' 가 끼어들어 영어로 노래를 시작했는데, 선곡되는 노래는 여러 절을 가진 전형적인 유절 형식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 유절 형식을 이용해 찰리는 나치 대영방송의 선전 효과를 배가했다.
1절에서 찰리는 원곡의 가사를 그대로 불렀지만, 2절에 가서 청취자들은 '비겁한' 영국 정부와 그 지도자인 '술고래' 윈스턴 처칠이나 '극악무도한' 유대인, '빨갱이' 소련을 까거나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쩔어주는 자뻑으로 개사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된 조지 거슈인과 베니 굿맨, 리처드 로저스 같은 유대인 작곡가의 작품까지 이런 식으로 연주하고 있었고, 곡에 따라 아예 1절부터 개사질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영국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저 건방진 독일 새끼들' 에게 진심으로 분노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찰리의 뭔가 어눌한 영어 발음과 속이 뻔히 드러나는 가사를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또 노래는 거지같지만 밴드 연주는 괜찮다며 나름대로 음악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고, 독일이 얼마나 영국을 두려워하는 지 알 것 같다고 역으로 추론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응이 적대적이든 냉소적이든, 혹은 극우/친독적 성향을 내심 감추고 통쾌함을 느끼든 간에 이 방송의 청취자는 엄청난 수로 증가했다.
실제로 전후 공개된 조사 결과, 무려 600만 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이 이 방송을 거의 매일 들었다고 한다. 다른 영국인들도 그들 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저 방송의 정체와 진행 방식, 전파하려는 메시지는 대충이라도 알고 있었다. 괴벨스가 이 방송으로 영국인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유력한 증거' 였다.
하지만 이 대영방송으로 독일이 얻을 수 있던 것은 거의 없었다. 많은 영국인들이 이 방송을 즐겨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 중 '자신들을 괴롭히는' 영국 정부를 전복시킨다거나 처칠을 암살하려고 한 이들은 없었다(있었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이 영국 본토 항공전 시기에 처칠이 시가를 꼬나물고 톰슨 기관단총을 든 사진을 가공해 '살인자 처칠' 이라고 묘사한 전단지를 뿌렸다가, 되레 '적이면 누구라도 가차없이 갈겨버릴 듯한 처칠' 이라고 해석한 영국인들에 의해 역효과를 당한 것과 비슷했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라는 노래를 듣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정말로 축지법을 쓰는 비범한 인물이라고 믿는 남한 사람들이 거의 없듯이, 찰리의 노골적인 영국까 성향의 노래만 듣고 자국 정부와 그 지도자를 불신한 영국인들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대다수 영국인들은 '우쭈쭈 그랬써염? 지랄떠는 모습이 귀엽네염' 식으로 빈정대면서 즐겼다. 영국 정부도 적국 방송을 들으면 중형에 처하던 독일과 달리 이 방송에 대해 어떠한 직접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고, 이런 영국의 자세는 오히려 독일이 '영국은 자신들의 비난에도 꿈쩍 않는 뚝심이 있다' 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전황이 악화되어가던 1941년 이후로는 이제 독일에도 심심하면 연합군 폭격 편대가 나타나 폭탄을 떨구고 가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찰리와 그의 악단도 1943년에 본거지였던 베를린을 떠나 독일 서남부의 슈투트가르트에서 계속 대영방송에 쓸 선전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하지만 전황 악화는 곧 더 많은 음악인들의 징집을 의미했고, 초반에는 거의 독일인으로 구성했던 이 악단도 이제는 벨기에나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같은 점령지와 이탈리아 같은 동맹국에서 스카웃한 외국 연주자들을 대거 영입해야 했다.
1945년 5월에 독일이 항복한 뒤, 대놓고 적국을 조롱하는 음악을 연주한 악단 단원들의 미래는 매우 어두워 보였다. 창단자 템플린과 가수 슈베들러를 비롯한 독일인 단원들은 모두 점령군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비독일인 단원들은 해방된 고국으로 압송되어 반역 혹은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상대적으로 매우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나 계속 자신들의 음악 경력을 이어갔다. 심지어 템플린은 서독 공영방송을 총괄하는 ARD에서 각 지국에 빅 밴드를 편성하는 계획의 입안과 실행에도 관여했다. 악단의 독일인 멤버 중 음악 활동을 금지당하는 중징계를 받은 인물은 직접적으로 나치의 입이 되어준 슈베들러 뿐이었다.
단원들이 받은 처벌이나 그들이 연주한 음악을 전후의 독일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1988년 4월 18일자에 실린 기사에서 드러머 브로크지퍼와 트럼페터 찰리 타보르가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이것저것 변명을 늘어놓으며 '우리는 그 당시 가장 좋은 음악을 만들었다' 고 강변한 내용을 보면, 당시 멤버들은 자신들이 음악으로 저지른 '짓거리' 를 별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단원들이 좋은 음악을 만들었네 어쩌네 하는 견해와 상관 없이, 찰리와 그의 악단이 취입한 녹음은 동시대에 '같이 나치의 통제를 받았지만 그나마 비정치적 음악을 연주했던' 독일 무도오락악단이나 여타 관제 무도악단과 달리 매우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 사유야 당연히 가사에서 나타나는 노골적인 나치 부역이겠고. 이들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재즈 음악을 연주했지만, 그 음악을 만든 의도는 전혀 순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연한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이 이들의 음악을 아예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위의 슈피겔 기사에도 나와 있지만, 독일 재즈사학자 라이너 로츠가 이곳저곳에서 수집한 이 악단의 녹음 자료를 영국(!!) 음반사인 할리퀸(Harlequin)에 맡겨 세 장 분량의 LP로 만들었고, 1990년에는 같은 음반사에서 CD 두 장으로 재발매 되었다. 2005년에는 어느 미국 인터넷 방송의 블로그가 이 CD들에서 추출한 mp3를 무료로 공개했다. #Charlie and His Orchestra #Still More Nazi Swing Music 또 2011년에는 쾰른의 TMK Musikproduktion und Verlag라는 업체에서 스무 곡의 녹음과 몇 편의 미발표 녹음들을 합친 CD 한 장을 추가 출반했다.
물론 이제는 독일에서도 이런 뻔하고 또 뻔뻔한 선전 음악을 들으며 나치를 찬양할 띨띨한 놈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결국 음악이 독재 권력의 손에서 맥없이 놀아났고, 그런 음악을 만든 이들이 별 죄책감 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이제는 전쟁 당시의 영국인들처럼 비웃으며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외에도 나치 집권기 독일에서 활동한 대중음악인들과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는 매우 많다. 다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강한 영향력을 과시한 미국 문화의 홍수 덕분인지, 일본과 미국(+영국) 외의 대중음악에 대한 선호도나 연구는 모두 미진한 상태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의 발달 덕에 굳이 음반을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들쑤시지 않아도 될 만큼의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앞으로 나보다 더 전문적으로 이 분야를 파고들 사람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