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느 악단에서 고정된 직책 없이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는 노장이 되었지만, 내가 대딩 시절이었던 때까지만 해도 박은성은 국내에서 상당히 잘나가는 중견 지휘자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오트마 주이트너에게 배운 경력 때문인지 한국에서 브루크너를 나름대로 맛깔나게 소화하는 지휘자로 유명한데, 수원시향에서 재직하던 시절에도 꽤 여러 곡을 무대에 올렸고 그 중 6번의 경우 교향악축제 무대에서 직접 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수원시향 재임기에는 꽤 여러 종류의 음반도 제작했는데, 개중에는 예의 교향악축제 실황을 녹음한 것도 있지만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베토벤/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제작한 바 있던 성남의 분당요한성당에서 스튜디오 녹음으로 제작한 본격적인 것도 있었다. 실황이든 스튜디오든 음반은 모두 독일 레이블 게누인(Genuin)의 한국 지사에서 정남일이 제작했고,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모두 여섯 종류의 CD가 나왔다.
하지만 수원시향이 소속된 수원시립예술단에 물어보니, 박은성 재임기 제작된 CD들은 모두 비매품이고 그나마 재고가 거의 동이 나서 예술단 유료회원 특전으로 제공 가능한 것은 딱 한 종류 뿐이라는 아쉬운 소식만 들었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무척 기대했던 브루크너 교향곡이 든 음반이 아니어서 더더욱 아쉬웠는데, 브루크너는 아니지만 그 게누인 음반들 중 하나를 기적적으로 황학동의 중고음반점 '돌레코드' 에서 입수할 수 있었다.
ⓟ 2005(?) Genuin Music Productions
커버에도 나와 있지만, 바그너 관현악 작품을 담은 CD다. 케이스 옆구리에는 녹음 일자와 장소가 적혀 있는데, 이 음반의 경우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을 담은 CD처럼 분당요한성당에서 2005년 7월 11-14일 동안 스튜디오 녹음한 것이었다.
수록곡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제1막 전주곡, '리엔치' 서곡, '탄호이저' 서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인데, 맨 마지막 곡은 보통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을 기점으로 두 트랙으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한국 관현악단이 바그너 관현악 작품을 음반으로 제작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KBS 교향악단이 국립교향악단으로 활동하던 막바지 시기에 홍연택의 지휘로 성음에서 만든 LP가 그것이다. 저 LP는 나도 가지고 있지만, 이런저런 실황녹음을 따다가 만든 것이고 음질과 연주 수준도 별로 좋다고 할 수는 없는 물건이다.
당연히 25년 가까이 지나 수도권 악단도 꽤 높은 수준의 연주력을 갖춘 시점에서 스튜디오 녹음으로 제작된 음반인 만큼, 음향과 음악의 질도 상당히 준수해진 모습이다. 다만 강남 심포니가 같은 장소에서 제작한 음반들보다는 소리가 좀 건조하고 어두운 편인데, 강남 심포니가 중편성 정도였던 데 비해 수원시향은 대편성이었고 또 음향이 훨씬 두꺼운 바그너 곡을 했기 때문에 성당 특유의 잔향을 줄이기 위한 컨셉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박은성의 바그너관은 점잖으면서 절도있는 모습인 것 같은데, 아직 제 목소리를 온전히 못낸 베버 스타일의 '리엔치' 에서도 쉽게 흥분하거나 격렬해지는 대목 없이 깔끔한 소리를 내고 있다. 다른 곡에서도 연주 양상은 비슷한데, 다만 '탄호이저' 의 중간부에서 더 끈적한 소리가 아쉽다거나 '트리스탄과 이졸데' 에서 더 뜨겁고 열정적인 모습이 보였으면 하는 개인적인 감상도 느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한국 악단이 바그너를 이 정도로 연주하고 녹음할 수 있다는 예시로서 중요하다는 생각 자체는 변함 없다.
오프라인에서 입수한 이 음반 외에도 인천의 뮤키라는 중고음반 쇼핑몰을 통해서도 또 한 종류의 CD를 구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대미사' 와 앵콜로 연주된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를 담은 것인데, 2006년 3월 8일에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으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한 수원시립합창단과 수원시립교향악단의 공연 실황이다. 독창자는 석현수(제 1소프라노), 전효신(제 2소프라노), 조성환(테너)과 정록기(베이스)가 섭외되었고, 지휘는 2004년 이래 계속 합창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인 민인기가 맡았다.
ⓟ 2007 Gloson
이 음반의 경우 게누인이 아닌 글로선이라는 국내 음반사에서 제작되었는데,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주로 개신교 성가대의 사가반을 위탁 제작하는 업체로 보인다. 보통 한국 시립합창단들의 경우 음반을 낸다고 하면 대체로 예술가곡이나 민요, 성가 등을 합창 편곡한 '가벼운' 레퍼토리를 고르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이 음반의 경우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모차르트의 대작 종교음악 중 하나를 골라 녹음했기 때문에 눈에 확 띄었다.
다만 실황을 담았다고 쓰여 있음에도 도무지 실황이 아닌 것 같은 대목이 꽤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여러 대목으로 나뉘는 대영광송 부분이 그런데, 몇몇 대목에서는 끝나자마자 실황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 실황과 그 직전에 한 무대 리허설 녹음을 섞어서 음반을 제작한 것 같은데, 음반 제작을 전제로 한 녹음이었다면 깔끔하게 잘랐어야 했다. 최상급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깨끗한 녹음 상태임에도 이런 옥의 티가 보인 것이 우선 아쉬웠다.
연주 면에서는 좀 더 투명한 합창 발성이 아쉬웠고, 오페라 아리아처럼 흘러가는 대목에서 독창자들의 순발력이나 정확한 음정 처리도 그랬다. 사실 모차르트 시대에 오면 종교음악도 콜로라투라 기교가 버무려지거나 세속 오라토리오와 다를 바 없는 성격의 음악 처리 등으로 인해 부르는 입장에서도 꽤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도 모차르트 탄생 기념으로 기획한 공연이었다면 사전 스튜디오 녹음이 더 괜찮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스튜디오 녹음이 아무 때나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니, 이렇게라도 나오는 음반은 마찬가지로 귀중한 아이템이다. 본격적인 관현악 레퍼토리에 많이 도전하는 관현악단들과 달리 합창단들이 대규모 합창곡 녹음에 아직도 소극적인 것은 많이 아쉬운데, 베토벤의 장엄미사라던가 브루크너의 번호 붙은 미사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베르디의 레퀴엠,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등 관현악 반주의 대규모 합창곡 음반이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제작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수원시립예술단에서도 재고가 없다고 했던 귀한 음반 두 종류를 입수했으니, 나머지 음반들도 차근차근 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게누인의 수원시향 음반들은 악장도 역임한 정남일의 업적을 봐서라도 차후에 재발매가 이뤄졌으면 하는데, 현재 상임 지휘자인 김대진도 베토벤 교향곡 음반에 이어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도 올해 완주하고 음반 세트로 내놓을 예정이라고 하는 등 음반 작업에 적극적인 모습인 것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런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