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공연 하면 사람들마다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텐데, 개인적으로는 담배 연기 자욱한 분위기에 술을 홀짝이며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인 다소 좁고 어두운 클럽에서 열리는 것이 일종의 고정된 이미지였다. 실제로 이런 분위기의 재즈 클럽이 없지는 않지만, 비흡연자 혹은 혐연자라던가 술을 못하는 사람의 경우 오히려 장애물 혹은 혐오 시설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때문에 요즘 클럽들도 금연 정책에 동참하는 경우가 많고, 주류 외에 이런저런 소프트 드링크 등을 갖추는 곳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또 술집에 공연장을 끌어들인 듯한 분위기 때문에 종종 손님들이 큰 목소리로 나누는 잡담이 음악 감상에 방해를 준다며 언짢아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인 지는 몰라도, 재즈를 기존의 클럽이 아닌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를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올해 가서야 처음 경험할 수 있었다.
토마토TV라는 방송국 산하 예술 전문 채널인 아르떼TV는 방송국 건물 지하 1층에 아담한 규모의 소공연장인 아르떼홀을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는 수요일과 목요일에 방송용 콘서트가 개최되곤 한다. 특히 요즘에는 재즈 쪽에 점차 방송 비중이 늘면서 수목 콘서트를 재즈 음악회로 갖는 경우도 많아졌는데, 아예 올해는 2월부터 11월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저 홀에서 재즈의 역사를 고찰하며 진행하는 연속 공연이 열리고 있다.
공연 제목은 포스팅 제목으로도 쓴 '필윤의 재즈 스토리' 인데, 공연의 사회자인 필윤의 경우 대학교 교양 강의 시절이 인연이 되어 매우 익숙한 뮤지션이었고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관람할 수 있었다. 티켓 가격도 전석 2만원이라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고, 이 기회에 그 동안 듣지 못했던 다른 한국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흥미를 강하게 자극했다.
'재즈의 태동' 이라는 부제의 첫 공연은 2월 21일에 열렸는데, 재즈 피아니스트 임미정이 이끈 피아노+드럼+베이스+기타+트럼펫 편성의 퀸텟(5중주단)이 출연해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의 레퍼토리들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녹화용 공연이었던 만큼 PD가 먼저 무대에 나와 공연 전 핸드폰 통화와 공연 중 사진 촬영, 자리 이동 문제에 대한 주의 사항을 설명했고, 먼저 필윤이 나와 그 날 연주되는 재즈의 특징에 관한 간단한 썰을 푼 뒤 뮤지션들이 나와 곡을 연주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연 전의 무대 세팅. 사진에서 보이듯이 내가 앉은 자리는 드럼 쪽에 가까웠는데, 드럼 소리 때문에 다른 악기의 소리가 좀 가려지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클럽이 아닌 공연장에서 이런저런 소음 요인이 배제된 재즈를 듣는 재미는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또 녹화 공연이었기 때문에 종종 NG가 나곤 했는데, 그 때마다 다시 촬영을 시작해서 차후 방송 분에서는 PD나 관련 제작진이 편집을 해서 방송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는 것 같았다.
첫 날 공연의 순서지를 통해 공연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알 수 있었는데, 우선 1부에서는 스콧 조플린의 The Entertainer, 제임스 P. 존슨의 Carolina Shout, 패츠 월러의 Ain't Misbehavin', 조 '킹' 올리버의 Sugar Foot Stomp 같이 지금은 고전이 된 뉴올리언스 재즈의 스탠더드들이 연주되었다. 다만 그 당시의 연주 양식을 완전히 고증한 것은 아니었고, 모던 재즈 퀸텟이라는 편성에 맞게 다소 현대적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원조 뉴올리언스 재즈를 원한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당시 뮤지션들의 연주 소개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면 굳이 라이브 콘서트 형식을 취할 필요 없이 음반 만으로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텔레비전이 아닌 라디오 프로그램에 적합한 형식이 되기 때문에 컨셉 자체가 맞지 않게 된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레퍼토리를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했을 때의 맛은 어떨 지를 기대한 나같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흥미로운 진행 방식이었다.
다만 이 콘서트의 방송 분량은 1부에 할애된 것으로 보이는데, 주어진 방영 시간 내에 그 날 공연의 컨셉을 보여주는 공연이 1부 뿐이고 2부는 그 공연에 초청된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연주를 맛보기로 더 들려주는 순서라서 언제 또는 어느 기회에 방영될 지는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도 이 공연을 방송이 아닌 실제 무대에서 미리 챙겨보는 것이 좋다고 느끼는 것이고.
그래서 1부 공연은 순서지에 적힌 모든 곡이 그대로 연주되었지만, 2부에서는 시간 문제 때문에 순서지의 곡이 모두 연주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임미정 퀸텟의 첫 날 공연 때는 다행히도 순서지에 적혀 있던 베니 골슨의 Whisper not, 임미정의 자작곡인 River, 빅터 펠드먼과 마일즈 데이비스 공동 작곡의 Seven Steps to Heaven, 그리고 임미정의 자작곡들인 Spring Joy와 Rainbow Chaser가 모두 연주되었다.
Spring Joy는 순서지에 없었지만 공연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었고, Rainbow Chaser는 앵콜로 추가 연주되었다. 이 날 2부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이 담긴 임미정 트리오의 3집 앨범이 1층 티켓 판매대에서 공연 호스트인 필윤의 CD들과 함께 팔리고 있었는데, 필윤의 CD는 이미 모두 구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거 살까 말까' 하고 한참 고민하다가 구입했다. 만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고, 또 지금은 레전설 노장 뮤지션이 된 베니 골슨이 직접 게스트로 참가한 음반이라는 점도 구매욕을 자극했다.
그리고 '스윙 시대' 라는 부제의 두 번째 공연도 마찬가지로 3월 14일에 아르떼홀에서 볼 수 있었다. 그 전 달 열린 공연의 티켓을 지참하면 20% 할인이 된다는 것을 이용해 18000원이라는 할인가로 즐길 수 있었다. 이번에는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이 이끈 섹스텟(6중주단)인 이정식 프로젝트 밴드가 출연했는데, 순서지에는 색소폰+드럼+베이스+피아노+베이스클라리넷의 퀸텟 편성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트롬보니스트가 추가되어 있었다.
부제에서 보듯이 이번 공연 컨셉은 1920~40년대 빅 밴드 전성기 시절의 소개와 그 당시의 유명 레퍼토리 공연으로 잡혀 있었다. 듀크 엘링턴 밴드의 주제곡인 빌리 스트레이혼의 Take the 'A' Train으로 시작해 엘링턴 자신의 곡인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스트레이혼의 Chelsea Bridge, 엘링턴과 쌍벽을 이뤘던 카운트 베이시 밴드의 히트 넘버인 버논 듀크의 April in Paris, 역시 베이시 밴드의 단골 연주곡이었던 제럴드 마크스의 All of Me 등 일곱 곡이 연주되었다.
리더인 이정식은 곡에 따라 소프라노색소폰과 테너색소폰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는데, 첫 날 공연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편곡해서 공연했다. April in Paris에서는 다른 악기 없이 색소폰과 피아노의 듀엣으로만 연주했는데, 이 자리에서 피아니스트 이발차가 이정식의 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만 이번 2부 공연에서는 시간 문제도 있었고, 또 공연 후 준비된 특별 이벤트-그 날이 마침 화이트데이여서 방청객들 중 추첨을 통한 공개 고백 이벤트가 있었다-때문에도 순서지에 오른 다섯 곡 중 두 곡이 생략되었다. 연주된 곡은 이발차의 Song No.1 (가제), 이정식의 Song for My Friends, 그리고 5/4박자의 독특한 리듬을 가진 이발차의 Bob's Mood 세 곡이었고, 여기에 특별 이벤트 직후 그 분위기에 맞추어 리처드 로저스의 My Funny Valentine이 앵콜로 연주되었다.
이정식의 앨범은 아쉽게도 그 날 현장 판매된 것이 없었는데, 그래도 2부 무대에서 연주된 곡들은 차기 신작 앨범에 들어갈 곡이라고 했기 때문에 미발표 곡들을 들어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대부분 상당히 모던한 맛에 콜트레인 풍의 복잡한 멀티포닉(불협화음)과 무조풍 연주가 양념처럼 곁들여진 곡들이라, 음반으로 나오면 과연 어떨 지 궁금하기도 했다.
필윤의 재즈 스토리 공연은 앞으로도 계속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될 예정이라는데, 이번 달에는 한국 재즈 뮤지션 최초로 미국의 유명 재즈 레이블인 블루 노트에서 음반을 낸 바 있던 피아니스트 곽윤찬이 출연해 비밥 시대의 곡들을 연주한다고 한다. 지금은 알바 때문에 바쁘지만, 일단 이번 주까지 하기로 했기 때문에 시간과 공연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뱀다리: 그리고 몇 가지 개인적으로 의아했거나 좀 안좋게 느꼈던 부분을 첨언하고 싶다. 지금까지 진행된 공연들에서는 1부와 2부 사이에 쉬는 시간이 없었는데, 용무가 급한 사람은 도중에 나오기가 좀 애매하다는 문제가 있다. 곳곳에 카메라가 배치되어 녹화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누가 나가는 장면이 잡히거나 하면 곧바로 NG가 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도 각 부 사이에 짤막하게나마 쉬는 시간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아늑한 발라드 연주 때 분위기를 살리려고 드라이아이스를 뿌려주는데, 그 기계음이 좀 커서 종종 연주 감상에 방해를 주기도 한다. 실제로 임미정 퀸텟이 연주한 첫 날의 경우 드러머가 그 기계음이 신경이 쓰였는지 연주 중간에 종종 뒤를 돌아보기도 했는데, 물론 방송 분량에서는 그런 잡음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실제 무대에서 연주하는 뮤지션이나 듣는 청중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으니 이런 부분도 시정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