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 휴면 기간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이것저것 구입하고 있는데, 다만 신품 보다는 중고 쪽에서 주목할 만한 물건들이 많아서 주로 이 쪽에 투자하고 있다. 대부분 회현지하상가의 미스티레코드에서 구입하고 있지만, 간혹 기대도 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대충 성격이 비슷한 음반 두세 종류끼리 묶어서 계속 쓰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독어권 음악의 위세에 너무 짓눌려서 제대로 평가를 못받고 있는 게 불어권 교향곡들이라고 여겨진다. 스위스 작곡가인 아르튀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의 교향곡도 마찬가지인데, 그 동안 실연으로 들었던 곡은 단 한 곡도 없었고, 음반으로 들었던 곡도 현악 합주(+트럼펫 애드립) 편성의 2번과 '전례풍(Liturgique)' 이라는 제목이 붙은 3번 두 곡 뿐이었다.
이 CD 세 장짜리 음반을 구입하면서 처음으로 오네게르의 교향곡 다섯 곡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작곡 연도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프랑스 6인조의 일원이었던 불어권 작곡가이면서도 바흐를 비롯한 독어권 거장들의 강한 영향을 수용한 만큼 중도적인 성향이다. 엄격함과 명쾌함이 동시에 갖춰진 음악이라는 생각인데, 다만 아직은 같은 6인조 출신인 미요 보다는 좀 귀에 덜 받는 편인 것 같다.
원래 교향곡만 담았다면 두 장으로 족했겠지만, 교향곡 외에 '교향 악장(Mouvement symphonique)' 이라는 이름이 붙은 세 곡의 관현악곡과 교향시 '여름의 목가(Pastorale d'été)' 까지 추가되어 장수가 늘어났다. 물론 교향 악장도 첫 번째 곡인 '퍼시픽 231' 과 푸르트벵글러가 초연한 제목 없는 세 번째 곡만 들어봤기 때문에 두 번째 곡인 '럭비' 가 추가된 이 커플링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역시 아예 못들어본 '여름의 목가' 도 마찬가지고.
연주는 파비오 루이시가 지휘한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이 맡았는데, 이 악단의 연주력이나 명성이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많기는 하지만 이 음반에서는 그런 기색을 별로 느낄 수 없다. 오히려 놀란 건 이 CD 세 장 분량의 음악을 단 3일 만에(1999년 7월 5~7일) 녹음했다는 기록인데, 아예 작정하고 만들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녹음을 마쳤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의 교향곡 열두 곡은 국립예술자료원에 소장된 cpo의 전집으로 들어본 바 있었는데, 다만 1917~23년 동안 워밍업 식으로 작곡했다는 여섯 곡의 실내 교향곡들은 아직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섯 곡을 모두 수록했다는 이 MDG의 CD는 내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본격적인 교향곡에 앞서 작곡되었기 때문에 작곡 초년생의 습작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미요는 첫 실내 교향곡을 작곡했을 당시에 이미 20대 중반이었고 작품 번호 붙은 것만 43곡 째 내놓고 있었다. 같은 모더니스트이면서도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던 오네게르에 비해, 미요는 다조(polytonality)라던가 재즈와 블루스, 브라질 삼바 등의 이국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작품에 많이 반영했기 때문인지 음악에서 좀 더 '라틴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다만 이 실내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에는 아직 외국 음악의 영향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는데, 그래도 다조나 반음계 진행을 적극 구사해 뭔가 엇나간 듯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맛이 강해서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각 곡이 기껏해야 3~7분 가량이지만 악장 구성도 3악장 씩 제대로 갖추고 악기 편성도 꽤 특이한 곡들이 많은데, 추려보면 이렇다;
1번: 피콜로/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하프/바이올린 2/비올라/첼로
2번: 플루트/코랑글레/바순/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3번: 플루트/클라리넷/바순/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4번: 바이올린 4/비올라 2/첼로 2/콘트라베이스 2
5번: 피콜로/플루트/오보에/코랑글레/클라리넷/베이스클라리넷/바순 2/호른 2
6번: 성악 4중창(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오보에/첼로
1~3번은 베토벤의 7중주나 슈베르트의 8중주 식으로 목관과 바이올린족 현악기를 섞어 편성하고 있지만, 4번에서는 현악 10중주를 택하고 5번에서는 고전 시대에 반짝 유행하고 사라진 목관악기 위주의 관악 합주인 하르모니무지크(Harmoniemusik) 편성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6번은 무가사 4중창과 악기 두 종류라는 상당히 기묘한 편성인데, 이 때문인지 미요의 실내 교향곡들 중 가장 연주 빈도가 낮다고 한다.
실내 교향곡들이 워낙 짧기 때문인지, 여기에 후기 바로크~초기 고전 시대에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 미셸 코레트(Michel Corrette, 1707-1795)의 작품들에서 주제를 따온 극음악에서 발췌한 모음곡인 '코레트 모음곡(Suite d'après Corrette)' 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제이컵스 필로라는 농장에서 여름마다 열리던 무용제를 위해 위촉받은 '제이컵의 꿈(Les rêves de Jacob)' 두 곡을 더해 1시간 남짓한 수록 시간을 채우고 있다. 이 두 모음곡도 각각 오보에/클라리넷/바순 3중주와 오보에/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5중주라는 간소한 실내악 편성으로 작곡되어 있다.
모든 곡의 연주는 독일의 실내악단인 앙상블 빌라 무지카(Ensemble Villa Musica)가 지휘자 없이 맡았는데, 사실 이 단체는 상설 단체가 아니라 공연이나 녹음 때마다 헤쳐모여 식으로 결성되는 임시 조직이다. 다만 임시라고는 해도 단원들의 면면이 굉장히 화려한데, 장-클로드 제라르(플루트), 잉고 고리츠키(오보에), 울프 로덴호이저(클라리넷), 클라우스 투네만(바순), 마리 루이제 노이네커(호른) 같이 관악계에서 본좌 취급을 받는 이들이 포진해 있다. 현악 주자들도 독일 관현악단들에서 악장이나 수석, 부수석 급으로 뛰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연주력 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이외에도 여타 프랑스 근현대 작곡가들의 교향곡 음반이나 음원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는데, 지금 주목하고 있는 건 낙소스 산하의 마르코 폴로에서 나온 앙리 소게의 교향곡 전집(네 곡)이다. 다만 이 음반은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들어보니 음질과 녹음 수준이 다소 낮아서 아쉬운데, 그렇다고 다른 경쟁반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라 아마 이걸 계속 찾아다닐 듯 하다.
그 다음 포스팅에서는 역시 미스티레코드에서 구입한 음반 두 종류씩을 다루려고 하는데, 한 부류는 나치를 피해 망명하거나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 소위 '퇴폐음악' 계열 작곡가들의 작품을 담은 것이고 또 한 부류는 어느 헝가리 작곡가의 교향곡들을 한 곡씩 담은 것이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