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밝히고 있지만, 나는 종교가 없고 사실상 무신론자다. 그렇다고 종교음악을 아예 안듣는 건 아니지만, 내 음반 목록에서 종교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고 그나마도 듣는 횟수 역시 많지 않다. 심지어 '이 곡 명작이라더라' 고 떠드는 데도 아직까지 못들은 곡도 꽤 있다.
이런 상황이기는 하지만, 한국 관현악단이 참여해 제작한 대규모 종교음악의 CD 수집은 여전히 계속 하는 중이다. 다만 아예 기독교 문화권이라서 일반 합창단과 관현악단도 자주 참가하는 유럽이나 미국 쪽과 달리, 한국에서 대규모 종교음악 연주는 주로 특정 교회 소속의 성가대나 악단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때문에 CD 혹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려면 흔히 좋든 싫든 '그들 만의 구역' 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그 '구역' 에 굳이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가끔 중고음반 사이트나 오프라인에서도 눈에 띄는 것을 주문하거나 구입해 오면 되니까. 근데 그 가끔이라는 빈도도 정말 가끔이라서,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다. 일단 그렇게 검색해대고 싸돌아다니면서 얻은 네 장의 음반이 있다.
ⓟ 2004(?) Gloson
메타복스에서 발견하고 주문한 것이 이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CD인데, 딱 봐도 알 수 있지만 영락교회 갈보리찬양대가 합창을, 서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관현악을 맡아 녹음한 것이다. 물론 교인이 아니고 앞으로도 아니겠지만, 영락교회라는 곳의 건물과 부지가 상당히 크고 넓기 때문에 그 근처를 거닐다 보면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을 정도다.
교회 규모가 크다 보니 찬양대도 여럿 있는 모양인데, 그 중 한 팀만으로 이 대작 오라토리오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인 것 같다. 지휘도 외부 지휘자가 아닌 이 찬양대 지휘자인 박신화가 맡았고, 주요 독창자 네 명 중 소프라노 신지화를 제외한 세 명이 모두 이 교회 찬양대 독창자 또는 지휘자다. 일단 더블 CD로 되어 있어서 전곡 녹음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다만 온전한 전곡은 아니고 후반부의 두 곡(41~42)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전곡의 가창은 원어인 독일어가 아닌 한국어로 하고 있다.
개신교 교회에서 연주하고 만든 것이라는 사실보다 이 한국어 번안 가창이 구매 의욕을 뚝 떨어뜨렸는데, 성악곡은 가능한한 원어 가사로 불러야 한다는 개인적 관점에서 일단 이것 만으로 충분한 마이너스 요소였다. 그래도 이 곡의 음반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 모험을 좀 해볼까 하고 결국 주문했다.
녹음 정보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속지에 2003년 11월 8일 연주 실황 장면으로 나온 사진이 있어서 아마 이 때 녹음한 것으로 보인다. 장소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예술의 전당 쪽을 뒤져봤지만 거기는 아닌 것 같고 아마 교회에서 공연한 걸로 생각된다.
찬양대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이라 그런지 꽤 준비를 하고 무대에 올린 것 같은데, 녹음이 좀 건조한 감은 있지만 음질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연주도 번안 가창이라는 것을 무시한다면 어느 정도 수준은 하는데, 다만 딱 하루만 열린 공연을 그대로 음반화한 것이라 다소 간의 어긋남은 감수해야 한다.
이 찬양대는 이 곡 외에도 2000년에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경기 도립 오케스트라(현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공연하고 음반으로 제작했다고 하는데, 아직 이 음반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아무래도 천주교 쪽이 원조인 미사 같은 곡보다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수난곡 같은 경우에는 개신교 지향 혹은 중립적인 곡들이 많아서 그런지 개신교회 쪽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많이 듣는 것 같다.
이 CD 이후에도 황학동 쪽의 장안레코드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진열대를 보다가 세 장을 연달아 발견하고 구입했는데, 이건 특정 교회 소속 성가대가 아니라 범기독교 합창단을 표방하는 칸티쿰합창단이라는 단체가 주축이 되어 제작된 음반들이다.
이 합창단은 경기도 고양시를 본거지로 하기 때문인지, 매년 1부에서 종교음악 대작+2부에서 합창과 관현악으로 편곡된 찬송가들이 연주되는 송년음악회를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개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많은 음반들이 제작되었는 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지만, 2008~10년의 송년음악회와 바흐의 루터 미사 3~4번이 공연된 11회 정기연주회 네 종류는 확실히 발매된 것 같다. 다만 위의 엘리야 음반과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공식 시판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합창단 지휘자인 서광태는 속지를 보니 연세대 작곡과 출신이라고 하는데, 대학 진학 이전부터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고 기존 찬송가에 직접 관현악 반주를 붙여 편곡해 공연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무반주 합창이나 피아노 반주곡 공연이 아닌 이상 관현악단이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데, 세 CD 모두 관현악단은 칸티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단체가 참가했다고 나와 있다.
다만 합창단과 달리 저 관현악단은 상설 단체는 아닌 것 같고, 칼 리히터 시절의 뮌헨 바흐 관현악단이 그랬던 것처럼 공연 때마다 헤쳐모여 식으로 급조되는 비상설 악단으로 보인다. 다만 그냥 전공 학생들이 대충 모이는 식은 아닌 것 같고, 해당 단체 홈페이지의 글들을 보면 KBS 교향악단 등의 프로 악단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 2008 Canticum Media
2008년 12월 28일에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1부 연주곡은 푸치니의 미사였는데, 흔히 글로리아 미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글로리아 미사는 자비송과 대영광송 두 부분만으로 구성되는 간소한 형식의 악곡이고 이 미사는 자비송-대영광송-신앙고백-거룩하시도다-하느님의 어린 양 다섯 개 부분이 모두 작곡된 온전한 미사곡이라 요즘에는 그냥 미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CD에서는 잘못된 표기가 그대로 쓰이고 있지만.
엘리야와 후술할 넬슨 미사와 마찬가지로 이 푸치니 미사도 이 음반을 통해 처음 들을 수 있었던 곡인데,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베르디가 작곡한 레퀴엠처럼 이 곡도 꽤 드라마틱한 곡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금욕적인 전통 종교음악 역할에 충실한 곡이었다. 물론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푸치니는 아직 20대 초반의 음악원 학생이었고, 푸치니 가문 자체도 대를 이어 종교음악을 작곡하던 집안이었으니 베르디처럼 오페라 스타일로 풀어가는 통속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다.
ⓟ 2009 Canticum Media
나머지 송년음악회들에서도 1부는 미사곡으로 채웠는데, 2009년 12월 29일의 송년음악회에서는 하이든의 미사 11번 '위기의 시대 미사(혹은 넬슨 미사)' 이 선곡되었다. 하이든의 미사 역시 지금까지 한 번도 음반으로든 공연으로든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CD 역시 내게 꽤 요긴한 물건이 되었다.
이 공연은 이 합창단이 개최한 다른 송년음악회들과 달리 프로그램을 좀 짧게 잡았는지, 1부와 2부를 각기 한 장씩 담아 더블 앨범이 된 2008년이나 2010년 실황과 달리 CD 자체는 한 장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CD 외에 공연 실황을 담은 DVD가 같이 들어 있고, DVD에는 CD에 누락되어 있는 크리스마스 캐롤 모음곡까지 담아놓고 있다. 물론 애초에 1부 연주곡만 노리고 샀기 때문에 내게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 2010 Canticum Media
2010년 12월 28일에 개최된 송년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미사 C장조가 1부 레퍼토리로 올라왔다. 이 곡은 그나마 샤이 지휘의 음반으로 들어본 바 있어서 어느 정도 귀에 익은 곡인데, 그렇다고 장엄미사 만큼 뻔질나게 듣는 곡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곡도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그리스도' 와 함께 베토벤이 창작 활동 중반기에 남긴 보기 드문 대작 종교음악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고, 또 한국 '토종' 연주로 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희소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다른 음반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합창단은 일단 개신교 성가대가 흔히 그러듯이 외국어 가사로 된 곡을 한국어로 번안해서만 공연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적어도 1부 레퍼토리는 모두 라틴어 원어로 부르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엘리야보다는 더 편하게 들을 수 있었는데, 녹음 상태도 의외로 상당히 좋은 편이다.
궁금해서 속지를 보니까 사운드미러 코리아와 황병준의 이름이 보여서 납득했는데, 사운드미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클래식 음반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들 중 하나다. 게누인 한국 지사가 정남일의 급서로 흐지부지된 뒤로는 수원시향과도 자주 작업하고 있는데, 김대진 지휘로 내놓은 베토벤 교향곡 5번과 2번, 그리고 최근에 나온 차이콥스키 교향곡 1~6번 전집도 이 회사가 제작한 녹음을 싣고 있다.
공식 시판 음반이 아닌데도 녹음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셈인데, 물론 당일치기 실황 음반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은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녹음 상태를 갖고 쉽사리 깔 수는 없는 물건들인 건 확실하다. 새삼스럽게 이 합창단이 내놓았다는 바흐의 루터 미사 녹음도 궁금해지는데, 다만 이건 진열대에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중고로 내놓기를 바라던가 합창단 쪽에 직접 문의해 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게 개인적인 호불호와 녹음/연주의 질적인 면에서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제작된 보기 드문 종교음악 음반들의 수집 기록을 남겨봤다. 그 이후에도 여러 주목할 만한 지름이 이어졌는데, 아마 다음에 끄적댈 것은 두 번째로 독일 아마존에서 배송대행으로 받은 DVD와 CD 한 종류씩, 그리고 수원시향/김대진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집에 관한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