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까지 음악제의 호스트 공연장이었던 시민문화회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흔히들 '달동네' 라고 표현하는 주택 밀집 지역이 있다. 동피랑이라는 곳인데, 원래 통영시 측에서 재개발을 추진해 없어질 예정이었지만 주민들의 삶을 보존하면서 벽화를 곳곳에 그려넣어 지역 명소로 살려보자는 견해가 많아서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거리가 되었다고 들었다.
다만 2002년 이래 간헐적으로 통영을 방문하면서도 이 마을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올해 같은 경우에는 일부러 음악제 전날 도착했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어디서 보낼 까 생각했다가 여길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물론 사량도나 욕지도 같은 주변의 섬 지역들에 대한 동경도 여전하기는 했지만, 가려면 훨씬 많은 시간과 예산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접어야 했다.
원래 동피랑 벽화마을은 이 날이 아닌, 다음 날에 가려고 했지만 워낙 가려던 곳들에서 퇴짜를 많이 맞은 탓에 시간이 오히려 좀 남아 도는 형국이었다. 시간이 오후 6시 가까워졌지만 해가 떠있는 시간도 꽤 길어졌기 때문에, 지금 가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라 바로 들어가 봤다.
동피랑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나는 시민문화회관 반대편에 있는 이 골목을 택했다. 오른쪽 귀퉁이에 자그맣게 시민문화회관이 적힌 도로 표지판도 보인다.
이미 2000년대 후반 부터 벽화가 그려지고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일단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 엄연히 거주지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물론 벽화가 그려지면서 방문객도 늘고 동네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에 비례해 외지인들의 민폐도 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지도에 붉게 표기된 길이 동피랑로인데, 다만 벽화 같은 경우에는 저 붉은 길보다는 그 안쪽의 골목에 더 많이, 또 깨알같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오르락 내리락할 부담은 감수해야 한다. 등산을 좋아해 산을 많이 타봤다던가, 고도가 높은 곳에 살아서 여러 번 언덕이나 계단을 오르내려봤다면 별로 부담이 없겠지만, 아니라면 좀 힘들 수도 있다.
그림은 꽤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 찍어본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먼저 동피랑로를 따라 오르는 동안 본, 좀 그로테스크한 벽화. 이중섭 화백 그림에 동백꽃과 통영시 공식 마스코트인 통멸이가 더해져서 뭔가 표현하기 힘든 묘한 키치스러운 느낌이었다.
사실 이 동피랑 마을 벽화는 고정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대략 3년 주기로 바뀐다고 하니, 이 곳의 그림들을 개인적으로 보존하고 싶다면 사진을 열심히 찍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 역시 예전에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사진들을 보고 혹시 윤이상과 관련된 벽화도 여전히 있으려나 해서 마을 곳곳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기한이 지나 지워지고 다른 벽화로 대체되었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저런 벽화를 보면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무슨 망루 비슷한 것이 나왔다. 역사가 오랜 건축물인지 아니면 급조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언덕 꼭대기인 만큼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인상적이었다. 다만 여기서 공식 포토존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거기보다 약간 아래에 있는 전망대였다.
망루에서 찍어본 항구 풍경. 날씨가 좀 흐리고 해가 막 지려는 찰나라 희뿌연 모습이 좀 아쉽기는 했는데, 나중에 방문할 때 날씨가 좋다면 다시 올라가 바라보고 싶다는 느낌은 충분히 들었다.
시민문화회관도 한 번 찍어봤다. 과연 내년에는 저기서도 음악제 공연이 열려 다시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기회가 주어질런지 모르겠다.
전망대에서도 다시 항구 풍경을 한 번 더 찍었다. 전망대 옆에는 주민들이 공동 운영한다는 공판장이나 기념품 가게가 있었고, 바닥에는 트릭 아트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다만 모 막장 드라마의 일부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다면서 홍보 대상으로 삼는 등, 이 곳에서도 유명 관광지라면 늘 맡게 되는 과도한 돈냄새가 좀 거슬리기도 했다.
드라마를 찍었든 어쨌든, 내 관심은 마을의 모습과 벽화에만 쏠려 있었으니 기념품 같은 것은 그냥 제껴두고 계속 언덕과 계단을 오르고 내려왔다. 천사 날개 그림이 가장 인기 있는 벽화라고 했지만, 오히려 내가 주의깊게 본 건 그 옆에 그려진 이 그림이었다. 물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을 그냥 동피랑의 큰 외벽에 그린 대형 벽화일 뿐이기는 했지만, 그 단순함과 규모가 묘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또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도 캔버스로 삼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버려진 집의 부엌에 생동감을 불어넣은 벽화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천사 날개 같은 것보다 이런 그림들이 내게는 더 호소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디부터 돌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기 때문에 왔던 길을 또 가고 하는 것도 빈번했다. 한 반 쯤 돌고 나서야 발견한 이정표. 통영이 아닌 토영이라고 적힌 것이 이채로운데, 충무에서 통영으로 지명이 바뀐 뒤 첫 ㅇ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기가 귀찮은지 현지인들은 그냥 토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 곳 벽화들은 저명한 화가들이 아니라 지역 예술인들이나 심지어 아마추어 혹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그린 것들인데, 그래서 이렇게 시대와 유행을 반영하는 그림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어느 공용 화장실 옆에 그려져 있는 보컬로이드 캐릭터들인 하츠네 미쿠(오른쪽)와 카가미네 린.
초딩 삽화가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작가는 아마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걸로 보이고 학교 미술 교사 혹은 미술학원 강사가 채색 등을 도와준 모양이다. 미쿠도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주된 그림은 카가미네 린과 렌이라, 작가가 이 캐릭터들을 각별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일본산 캐릭터들 외에도 눈에 띄는 소재는 곳곳에 있었다. 뽀통령께서는 어디서든 지켜보고 계신다.
처음 찍어본 이중섭 그림 패러디 외에도 시 제목을 틀리게 적은 게 좀 걸렸지만, 지방색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하나 더 찾을 수 있었다. 이 곳 출신으로 시조를 현대적인 느낌으로 재해석해 유명한 시인 김상옥의 대표작 '편지' 를 적은 것인데,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도 단골로 실리는 시고 윤이상의 초기 가곡 여섯 곡 중에 다섯 번째 곡도 이 시를 가사로 하고 있다. 윤이상과 김상옥은 해방 후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지역 문화 부흥을 주도했기 때문에, 초기 작품 중에는 김상옥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을 여러 편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벽화가, 또 동네 풍경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던 이 날 일정에서 그나마 인상적이고 볼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된 것은 길가의 벚꽃들과 이 마을이었다. 이 마을이 앞으로도 벽화 마을로 기억될 지, 아니면 벽화가 있는 그냥 그런 관광지로만 남을 지는 모르겠지만, 주민들의 삶과 벽화라는 예술, 그리고 관광지라는 명성이 어느 하나 지나치게 튀어나오지 않고 균형있게 어우러지길 바라고 싶다.
음악제 개막 당일이었던 다음 날 일정도 뜻한 대로 다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어느 정도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쓸 것은 여전히 많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