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요즘은 주중에 항상 일하느라 바쁘고, 주말에는 쉬고 나다니느라 바빠서(?) 이런 쪽에 의외로 신경을 별로 쓰고 있지 않다가 받은 거라 놀라기도 했다. 수록곡은 단 세 곡 뿐이지만, 그 중 두 곡은 음반으로 처음 빛을 보는 것이라 놀람과 기쁨의 가치는 충분했다.
1. 오보에(와 오보에 다모레) 협주곡 (1990)
하인츠 홀리거 (오보에 & 지휘), 브레멘 독일 실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윤이상이 남긴 관악기 협주곡으로는 마지막 곡인데, 발터-볼프강 슈파러가 집필한 해설에 따르면 1990년 11~12월에 평양에서 머물던 중 미국의 쿠세비츠키 음악 재단의 의뢰로 작곡되었다고 한다. 당시 윤이상은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산소 호흡기를 달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곡에서는 그러한 쇠약세를 느끼기 힘든데, 오히려 윤이상의 여느 기악 협주곡들과 마찬가지로 독주자를 '잡는' 수준은 상당한 편이다. 독주자에게 요구하는 기교와 반비례해 한층 부드러워진 음향과 여백의 미라는 후기 작품 특유의 면모는 여전한데, 오보에 협주곡임에도 하프의 오블리가토가 자주 두드러지는 것은 아마 초연자인 하인츠 홀리거의 부인이 하피스트였음을 의식한 것 같다. (참고로 홀리거의 부인이었던 우어줄라 홀리거는 올해 1월 21일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작년 9월 7일에 홀리거가 오랜만에 내한해 정명훈 지휘의 서울시향과 연주한 곡도 이 협주곡이었는데, 비록 관람은 못했지만 정권이 보수 쪽으로 바뀐 뒤 윤이상과 그 음악에 대한 평가절하가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들린 희소식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정명훈이 DG 레이블에 윤이상의 여타 관현악 작품들과 함께 이 곡도 녹음해주길 바랬고, 지금도 비슷한 심정이다.
사실 이 곡이 담긴 CD를 이미 갖고 있는데, 2003년 통영국제음악제 실황이 담긴 비매품 CD를 현지에서 입수한 것에 마찬가지로 홀리거가 독주와 지휘 1인 2역을 맡아 연주한 음원이 수록되어 있다. 이 때 관현악은 독일의 앙상블 모데른과 한국의 TIMF 앙상블이 합동으로 맡았는데, 그것과 이것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일단 통영국제음악제 비매품 CD의 것이 협회반보다 약 2분 가량 빠른데, 템포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연주의 기조는 비슷한 편이다. 협회반 음원은 1997년 12월 10일에 브레멘의 콘서트 홀인 디 글로케(Die Glocke) 대강당에서 열린 공연 실황을 브레멘 방송국이 녹음한 것을 사용했다. 다만 연주 종료 후의 박수 소리는 생략되어 있다.
2. 8성 혼성 합창과 바이올린 독주, 타악기를 위한 '오 빛이여...' (1981)
타츠미 아키코 (바이올린), 지크프리트 핑크 & 라이너 뢰머 (타악기), 남독일 방송 합창단(현 남서독일 방송 보컬 앙상블)/마리누스 포어베르크
개인적으로 윤이상의 작품들 중 가장 인지도가 낮은 게 성악곡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초기 가곡집이야 그 평이함 덕에 아직도 부르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독일 정주 후의 성악곡은 '밤이여 나뉘어라' 같은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녹음이나 영상물이 없어서 듣고 싶어도 들을 방도가 없다는 게 문제다.
그로쇼프와 나눈 대화에서도 그런 아쉬움을 표한 바 있었는데, 결국 이 합창곡이 10집에 포함되어 세계 최초로 출반되었다. 대규모 칸타타나 오라토리오를 제외한 윤이상의 합창곡들은 나비의 꿈(1968)과 이 곡, 주는 나의 목자시니(1981), 그리고 1982년에 오페라 '심청' 에서 발췌 편곡한 도(道)에서 네 곡 뿐인데, 사실 연주 난이도가 리게티의 것들 보다는 그래도 쉬운 편이지만 이상하게 연주 빈도는 아직도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이미 1960년대의 대표작인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에서 윤이상은 불경의 구절을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를 삽입해 유럽 청중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한 바 있는데, 이 곡에서도 훗날 교향곡 5번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되는 독일 출신의 스웨덴 시인 넬리 작스의 시에 알폰소 마리아 디 놀라가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독일어로 중역한 대승불교의 불경 구절을 삽입해 가사로 구성했다.
단일 합창곡으로는 연주에 18분이나 걸리는 대곡인데, 무반주가 아니라 독주 바이올린과 타악기가 곁들여지기는 하지만 기악이 성악의 연주를 수식해 주는 일반적인 의미의 합창 반주가 아니라서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잡기가 쉽지는 않은 곡이다. 이 때문에 프로 합창단들이 섣불리 부르지 않는 모양인 것 같은데, 게다가 한국 합창단이 이런 곡들을 아직 제대로 소화할 단계는 아니라서 한국에서 윤이상 합창곡을 들을 기회는 무척이나 적은 편이다.
수록 음원은 이 곡의 초연진과 똑같은 라인업으로 초연 이틀 뒤에 슈투트가르트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포어베르크는 네덜란드의 NCRV 보컬 앙상블 지휘자로 재직하면서 제수알도에서 리게티에 이르는 폭넓은 합창 레퍼토리들을 다루던 노련한 합창 지휘자였고,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방송 합창단을 이끌며 비슷한 성과를 거두었다.
3. 실내 교향곡 제2번 '자유의 희생자들에게' (1989)
앙상블 모데른/로타르 차그로세크
'오 빛이여...' 와 함께 놀라움을 안겨준 선곡이었는데, 해당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게 첫 음반 발매로 기록되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거의 한 해마다 한 곡 씩의 교향곡을 작곡한 뒤 윤이상은 추가로 1987년과 1989년에 실내교향곡을 더 작곡했는데, 1번의 경우 알렉산더 리브라이히 지휘의 뮌헨 실내 관현악단 녹음(ECM)과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 지휘의 서울바로크합주단 녹음(낙소스) 두 종류가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지만 2번은 아예 음반도 없어서 들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989년 작품이고 제목도 '자유의 희생자들에게' 라서 베를린 장벽 붕괴+동유럽의 민주화 운동과 뭔가 연관이 있는 곡인가 했는데, 해설지를 보니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붙인 부제라고 한다. 단악장 형식이었던 전작과 달리, 이 곡은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제로 되어 있고 관악기와 타악기가 좀 더 다채롭게 편성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콘서트홀인 알테 오퍼(Alte Oper)가 위촉한 곡인데, 초연도 해당 홀에서 이루어졌다. 이 녹음도 헤센 방송국이 제작한 바로 그 초연의 실황인데, 실황이기는 하지만 청중석의 소음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고 박수도 삭제되었다. 악보에는 현악기 편성에 대해 딱히 지정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녹음에서는 현악 합주가 아니라 현악 5중주 형태의 편성을 택해 연주하고 있다.
9집 발매가 지체된 데 비해 10집이 예상보다 빨리 나와서 아직 협회가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획을 포기 혹은 보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나도 이러한 협회의 움직임에 답례하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입수한 음반 두 장을 그 쪽으로 부치려고 준비하고 있다. 해당 음반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