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개인적으로는 햄버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같은 값이면 차라리 싼 식당에서 백반이나 국밥 먹는게 더 든든하고 아무래도 빵이다 보니 쉽게 배가 꺼지기 때문인거 같다. 게다가 길거리표부터 정식 체인까지 많은 햄버거들에 들어가는 오이피클도 문제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송탄 햄버거가 꽤 맛있다더라' 고 얘기하는걸 듣게 됐는데, 특별히 그 지역을 강조하는걸 보면 기존 프랜차이즈 체인은 아닌거 같았다. 그리고 몇몇 블로그에서 포스팅을 보게 됐는데, 미국식 햄버거가 아니라 달걀 프라이가 들어가는 '한국식' 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 번 미친 척하고 '대체 무슨 맛인지 먹어보기나 하자' 는 뇌내반응 아래 완전 말도 안되는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물론 전역 직후 호두과자 사먹으러 천안까지 간 적도 있지만, X뺑이 치느라 못했던 수도권 전철 개통구간 완주를 목표로 했다는 의미가 더 컸으니 존중해달라능? 그렇다능?)
가게에서 가장 가깝다는 송탄역은 급행도 서지 않는 역이었기 때문에, 그냥 동묘앞역에서 완행을 잡아 타고 두 시간여를 달렸다. 어찌나 길었는지, 노마진 네 사람과 종교세일즈맨 한 사람의 퍼포먼스를 관람할 정도였다. (천안까지 갔다면 얼마나 더 늘어났을지)
*짤방은 클릭하면 그럭저럭 커집니다. 다만 음식사진 두 장은 예외.
어쨌든 송탄역 도착. 지금은 평택시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만 과거 송탄시였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나름 역세권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는데, 그나마 내가 갈 곳은 그 역세권에서도 좀 벗어난 곳이었다. 5번 출구로 나와 임시변통으로 만든 주차장을 가로질러 역시 애매한 2차선 도로를 따라 서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약도는 대충 보고 왔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왼쪽 골목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가다 보니 축대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 동네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알게 해주는 부분이 있어서 찍어 봤다. 실제로 아직 목적지에 닿지도 않았는데 곳곳에 한영 병기 표지판이 보이고 있어서 꽤 이채로웠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헤집으며 언덕 하나를 넘어가니 어렴풋이 블로그들에서 본 철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영어 간판이 갑자기 많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곳 가까이에 군부대가 있고 특히 미군이 많이 주둔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려주는 단서였다. 하늘에는 아파치 헬기를 비롯한 여러 공군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이태원의 축소판 같다고 생각되는 가게들. 주황색 간판의 음식점은 생선튀김 가게 같았는데, 달러도 같이 받고 환전도 해준다고 쓰여 있었다.
어쨌든 그 철구조물에 다다랐는데, 철구조물에는 '신장쇼핑몰'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짤방 왼편에 공군 부대 입구-역에는 K-55부대라고 되어 있음-가 있는데, 아무래도 햄버거 대신 국정원 가서 설렁탕 먹을까봐 소심해서 그 쪽은 찍지 못했다. 어쨌든 정면에 오늘의 목표 점포가 된 '미스진 햄버거' 가 보인다.
신장쇼핑몰의 '한국식' 햄버거 가게는 대략 네 군데 정도였는데, 두 군데는 노점 가판대였고 나머지 두 군데는 정식 점포였다. 그 중에 미스리가 원조인지 미스진이 원조인지 하는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데, 뭐가 어쨌건 간에 눈에 먼저 보이는 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후방 확인도 철저히 했다면 아마 '미스리 햄버거' 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는데, 미스리와 미스진은 좀 떨어져 있긴 해도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해당 가게 앞에서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근접해 있었다.
어쨌든 밀가루값 폭등 때문에 우리 동네 단골 돈까스집마저도 3500원으로 가격을 올려받고 있고, 예전에 개당 500원에 파는 대인배 인심을 자랑하던 학교 근처 와플 노점상도 이제 700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저 곳도 마찬가지의 가격인상크리 작렬. 내가 블로그들에서 봤을 때는 햄버거랑 핫도그가 각각 1500원이었는데, 늦게 온게 죄라면 죄고 실책이라면 실책일지. lllOTL
가게 안을 들어가니 탁자가 세 개밖에 없는 걸로 봐서는 많은 고객들이 포장해서 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내 앞의 손님들은 각각 햄버거와 불고기치즈버거를 10개씩 주문해 가져갔고, 가게 앞에 있는 창문을 통해 품목을 이야기하고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메뉴에는 달러 가격도 표기되어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미군 손님은 없었음)
직원은 가게 주인인 중년 부부 두 분 뿐이었는데, 그래서 음식이 나오는 속도가 좀 느린 편이었다. 그나마 내가 메뉴를 빨리 결정하고 이야기했다면 좀 더 빨리 받을 수도 있었지만, 뭘 먹어야 할 지 망설이고 있는 찰나에 단체 주문 두 개가 들어온 것이었다. 일단 용기를 내서(???) 햄버거 하나와 핫도그 하나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패티와 햄, 스팸 등을 굽는 철판. 고기류는 주문이 들어와야 굽기 시작하기 때문에, 많이 주문하던 적게 주문하건 기다리는 시간은 비슷하다.
그 옆에는 달걀을 부치는 철판과 빵을 데워 패티와 야채를 얹는 철판, 그리고 그 옆에는 케찹통과 음식 포장에 쓰는 알루미늄 포일 상자들이 쫙 진열되어 있다. 샌드위치는 식빵을 토스터기에 구워서 쓰고, 햄버거와 핫도그용 빵은 철판 밑의 선반에서 꺼내 철판 위에 놓고 데우는 식이었다.
어쨌든 계속 기다린 끝에 주문한 음식들을 받았다. 왼쪽부터 이름모를 탄산 레모네이드와 핫도그, 햄버거. 음료수는 모두 뚱땡이캔이고, 한 캔당 1000원 균일가에 셀프다. 마시고 싶은 걸 냉장고에서 꺼내와 같이 계산하면 끝. 내가 갔을 때는 닥터페퍼와 웰치스 포도맛/딸기맛, 미스트, 코카콜라, 스프라이트, 그리고 레모네이드가 들어 있었다.
캘리포니아 레모네이드. 제조 과정을 보니 좀 느끼할거 같아서 신맛이 나는 음료가 딱일 거 같아 선택했다. 실제로 마셔보니 단맛 보다는 신맛이 더 강했는데, 나름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그리고 촬영자의 허접 스킬과 카메라의 안습 성능을 동시에 보여주는 햄버거와 핫도그 단면도(그래서 짤방 크기를 팍 줄였음). 패티나 채썬 양배추와 양파, 달걀 프라이는 나름 충실한 내용물들이었지만, 의외로 합체 상태(???)가 좋지 않아 입가에 케찹을 범벅해 가면서 먹어야 했다.
핫도그는 미제 프랑크 소시지 하나가 들어가되 반으로 갈라서 쓰고 있었는데, 미제라서 그런지 확실히 짠맛이 강했다. 핫도그에도 달걀 프라이가 들어가는게 특이했는데, 역시 합체 상태는 좋지 않았다. 다행히 탁자 위에는 냅킨이 가득 놓여 있어서 내키는 대로 쓸 수 있었다. 햄버거와 핫도그 모두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행여 먹성 좋은 미군이나 한국군 병사들이 들어온다면 스페셜버거나 왕핫도그 같은 큰 사이즈의 메뉴를 주문해야 할 듯.
햄버거+핫도그+캔음료=5000원. 싼 가격은 아니었고, 거기다가 왕복 차비까지 생각하면 정말 똘끼넘치는 짓거리였다. 집에서 가까우면 몰라도 여기까지 원정와서 먹을 정도로 죽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이런게 있었고 맛은 어떻구나' 라는 확인 차원에서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차라리 좀 더 욕심을 내서 기본 메뉴보다 칠리나 스테이크 같은 이색 메뉴를 노려볼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쨌든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가보기로 하고 철구조물을 지나 명동거리 축소판처럼 꾸민 쇼핑몰 거리를 거닐어 봤다. 가다 보니 맥도날드도 나왔는데, 막 졸업식을 끝낸 여학생들이 떼를 지어 앉아 있었다. 왜 길거리에 밀가루며 달걀껍질이 떨어져 있나 했더니만. 그리고 아래와 같은 캐간지 디자인의 클럽이나 바도 있었다.
계속 가다 보니 웬 건널목 비슷한 곳도 나왔는데, 나름 철도빠인 터라 꽤 궁금했다. 하지만 차단기도 없는 걸로 봐서는 폐선되었거나, 있어도 사용 기회가 무척 드문 인입선으로 보였다. 아마 송탄역과 미군부대를 잇는 인입선 같았는데, 밑에 보이는 바와 같이 자동차도 주차되어 있었고.
일단 철길은 무시하고 계속 쇼핑몰 거리를 걸어 빠져나왔다. 아래 짤방이 그 끝인데, 나는 왼쪽-천안 방향-으로 걸었다. 사진 찍은 방향의 바로 반대쪽에 철길과 방음벽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만 따라 걷는다면 길잃거나 헤맬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걷다 보니 아까 봤던 인입선이 또 나왔는데, 굳게 닫혀 있는 철문 너머로 송탄역사가 어렴풋이 보였다. 확실히 인입선 맞긴 했는데, 역시 상태가 영 아니다.
고가도로가 지나가는 인입선을 다시 한 번 건너 쭉 가다 보니 아까 처음 걸었던 그 '애매한 2차선 도로' 가 나왔다. 아예 그냥 그 도로만 쭉 따라가다가 모퉁이를 돌아갔으면 좀 더 쉽게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도로의 1/3은 주차장이나 마찬가지였고, 포장된 상태로 나뉜 단면이 중앙선 역할을 하는 참 기묘한 도로였다. (차량 통행은 그다지 많지 않았음)
그래서 다시 5번출구를 찾아 집으로 고고싱. 가면서도 오면서도 '니가 이런 짓도 하는구나' 면서 자뻑과 자학이 혼합된 독백을 머릿속으로 줄곧 했는데, 하도 변화없이 돌아가는 일상이다 보니 어떻게든 일탈 충동이 분출될 운명이었나 보다. 어쨌든 다음에는 경원선타고 신탄리까지 가보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또 맛있는 두부요릿집이 있다고 해서 그것도 기대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