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던 그 나라의 '역사' 는 적던 많건 아무래도 자신들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편집되어 교육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고고학 사료 등을 통해 검증이 되었건, 아니면 진정성이 불분명한 신화 등에 의거하던 간에 하나의 민족적 긍지로 자리매김되고, 계속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는 거겠고.
일본의 경우에는 20세기 중반 까지도 '고지키' 나 '니혼쇼키' 등의 '역사서' 기록에 의해 자신들의 건국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660년에 초대 천황이 된 '진무천황' 의 집권 시기부터를 세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기를 기점으로 '황기' 를 쭉 계산해 보니 1940년이 2600주년이 되는 해가 되었다.
물론 저 진무천황도 실존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무려 120년도 넘게 살았다는 기록 자체에 별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 누군가가 대입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군국주의 시절이었으므로, 일본 정부에서는 그 해를 대대적으로 경축하기 위해 갖가지 행사를 마련했다.
양악 쪽에서는 일본 국내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황기 2600주년 기념 봉축 작품' 들을 위촉하는 기획도 이뤄졌는데, 일본이 양악을 받아들인지 꽤 오래되었다고는 해도 이 만큼의 대규모 행사를 개최해본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부터 학생까지 온갖 배경과 연령, 계층의 인사들이 경축 음악회를 위해 총동원되었다.
일본 정부가 작품을 위촉한 나라들은 그 당시 추축국 쪽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목록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비시 괴뢰정부) 대표
자크 이베르 (Jacques Ibert, 1890-1962): 축전 서곡 이탈리아 대표
일데브란도 피체티 (Ildebrando Pizzetti, 1880-1968): 교향곡 A장조 헝가리 대표
샨도르 베레슈 (Sándor Veress, 1907-1992): 교향곡 (제 1번) 영국 대표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진혼 교향곡 독일 대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4-1949): 일본 축전 음악
이외에 미국에도 위촉을 했지만, 그 시기에 이미 미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으므로 미국 정부에서는 위촉 제의 자체를 거절했다. 가장 먼저 완성되어 악보가 도착한 곡은 베레슈의 곡이었으며, 맨 마지막에 들어온 곡은 브리튼의 곡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브리튼 작품이었는데, 축전 의식에 진혼곡을 연주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엄한 것으로 여겨졌고, 파트 악보 준비가 끝났을 때 이미 영일 외교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어 서로를 적성국으로 분류하게 된 상황이라 거의 강제적으로 행사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이베르와 피체티, 베레슈, 슈트라우스 네 사람의 작품이었다.
네 작품의 파트보 준비가 끝나고 관현악 총연습에 들어간 것이 10월 12일 부터였는데, 무려 30여회의 리허설을 감행할 정도로 엄격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한다. (행사에 필요한 관현악단 구성에는 지휘법 교재로 유명한 사이토 히데오가 관여하고 있었음) 거기에 대내외적 위신 과시를 위해서였는지, 악단 규모를 터무니 없이 크게 잡은 까닭으로 연습도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임시 편성된 악단의 정식 명칭은 '기원 2600년 봉축 교향악단' 이었는데, 신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과 주오 교향악단(현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방송 관현악단, 궁내성 아악부 양악기 주자들, 도쿄 음악학교 관현악단 등을 통합해 만든 것이었다. 편성은;
그리고 지휘자도 작곡가들의 국적에 맞추어 일본 국내 뿐 아니라 일본에 체류하던 추축국 측 인사들을 같이 섭외해 행사의 정치적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베르는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 베레슈는 하시모토 구니히코(橋本國彦), 피체티는 당시 궁내성 악부 양악 담당 교사로 체류중이던 이탈리아인 가에타노 코멜리(Gaetano Comelli),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우에노 음악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독일인 헬무트 펠머(Helmut Fellmer)가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그렇게 해서 1940년 12월 7-8일에 우선 국내외 귀빈용 비공개 특별 연주회가 도쿄 가부키자에서 열렸고, 일반 청중을 위한 공개 연주회는 14-15일에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18-19일에는 도쿄 방송 회관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겸한 방송용 연주회가 열렸으며, 각각 이베르와 베레슈, 피체티와 슈트라우스 작품이 방송되었다. 이어 26-27일에는 오사카 가부키자에서 간사이 지방 청중들을 위한 공연이 추가로 개최되었다.
방송 연주회때 녹음된 래커판은 이듬해에 일본 컬럼비아에서 레코드로 제작되었으며, 일반 판매용 외에 추축국과 기타 점령국에도 선전용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저 때 작곡되어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은 오히려 거부당했던 브리튼 작품 뿐이며, 나머지 네 작품은 좀처럼 언급할 기회가 없는 상태다.
축전적 성격 보다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반전 의식 등 복잡한 개인사를 작품에 반영했다는 브리튼은 제쳐두더라도, 네 작품 모두 내용 보다는 외면적 효과에 치중하거나 '어설픈 오리엔탈리즘' 에 매달려 자신들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위촉국이었던 일본에서는 그나마 저 행사와 작품들에서 정치적 색채를 가능하면 떨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데, 패전 후에도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여러 차례 리바이벌하고 올해에는 네 작품의 레코드 모두를 복각한 CD를 발매하기도 했다.
네 작품 가운데에는 작곡자 자신마저 낮게 평가한 것까지 있었는데, 슈트라우스가 그 사례였다. 슈트라우스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선전성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설득과 협박을 반복하는 등쌀에 못이겨 억지로 썼다고 한다. 실제로 그 시기에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의 한 대목에서는 이러한 표현도 나타난다;
"그 동안 나는 일본적인 영감으로 잉태된 뇌에서 '하찮은' 열두 쪽 짜리 총보를 쥐어 짜냈어."
어쨌든 슈트라우스는 그 작업의 댓가로 선전성으로부터 10000라이히스마르크의 거금을 받았고, 일본 정부로부터는 연주에 사용된 범종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연주회 시리즈가 있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을 직접 지휘해 도이체 그라모폰에 음반을 취입했는데, 지금도 프라이저(Preiser)에서 CD로 복각된 것을 들을 수 있다. (아래 짤방 참조)
ⓟ 1994 Preiser Records
곡들의 질이야 어쨌건, 이 음악회와 그로 인해 제작된 레코드는 꽤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이리저리 관련되어 이 시기의 음악사를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에게 좋은 '떡밥' 이 되고 있다. 가령 안익태가 유럽 체류 시절 보여준 미심쩍은 활동에도 슈트라우스와 베레슈, 피체티의 위 작품들이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독일 매니지먼트였던 한스 아들러의 안익태 홍보물에 소개된 지휘 곡목에도 윗칸에 기입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안익태가 그렇게 강조했던 슈트라우스와의 친분 관계도 이 '일본 축전 음악' 을 통해 이뤄졌는데, 빈에서 슈트라우스에게 받은 첫 번째 추천장에도 '나의 일본 축전 음악을 훌륭히 지휘한 것을 축하하며' 라는 자필 문구가 기입되어 있다. 그러나 안익태는 전후 저 추천장이 자신의 활동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해 슈트라우스에게 따로 추천장을 하나 더 요청하기도 했는데, 그런 탓에 슈트라우스의 안익태 추천장 하면 두 번째 것만이 언급될 뿐이었다.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에서도 저 곡들은 좋던 싫던 양악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알려지게 됐는데, 윤이상과 동향인이자 동창이었던 작곡가 정윤주도 임동혁에게 작곡을 배우던 시기에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의 레코드들이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슈트라우스, 이베르, 베레슈의 해당 작품들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해외 위촉 외에 일본 작곡가들도 기원 2600주년 기념 작품을 여러 편 작곡했는데, 전년도였던 1939년부터 관현악 작품 공모전이 열렸지만 입상작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관련 행사나 경축 음악회 등에서 연주되었는데, 현재 파악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이후쿠베 아키라: 교향 무악 '에텐라쿠'
하야사카 후미오: 서곡 D장조
하시모토 구니히코: 교향곡 제 1번
오자와 히사토: 교향곡 제 3번 '일본 창건 교향곡'
노부토키 기요시: 교성곡 '해도동정' (가사: 기타하라 하쿠쇼)
미츠쿠리 슈키치: 서곡 '대지를 걷는다'
기요세 야스지: 일본 무용 모음곡
오키 마사오: 깃옷
오누마 사토루: 대환희
사이토 우시마츠: 행진곡 '대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 군악대 공동 작곡: 행진곡 '대일본'
야마다 고사쿠: 오페라 '구로후네(흑선. 개항 시기 외국의 배를 일컫던 단어)'
위 작품들 중 야마다의 오페라는 1988년에 도시바의 CD 복각판이 국내에 정식 수입되었으며, 하시모토와 오자와의 교향곡들과 하야사카의 서곡은 낙소스의 '일본 작곡가 선집' 에 포함되어 역시 국내에도 정식 수입되어 있다(각각 8.555881과 8.557416, 8.557819). 물론 일본측 자료들에서는 행진곡 두 곡과 오누마의 작품을 제외하면 작품 자체에 정치적인 색채가 없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런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비슷한 사례로 예전에 지독하게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월간XX의 과월호를 뒤적이다가 보게된 한 유명 원로 작곡가의 인터뷰 기사도 있었다. 거기서 그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들-대부분 정치적 행사용으로 만든 곡들임-을 열거하면서 왜 자신의 작품이 초연 후 사장되어 있는가를 자문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 분께는 매우 아쉽지만 위의 작품들이 왜 음악적으로 낮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가 똑같은 답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리고 인터뷰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분은 심지어 스탈린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도 작곡한 바 있었음.)
음악인들에게 '도덕성이나 현실 인식' 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과한 문제라는 지적도 있고, '당신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냐' 는 식으로 보편성에 특수성을 대입시키는 억지 질문을 던지는 것도 여러 차례 보았다. 역사라는 객관적 흐름 자체를 주관적 영역으로 끌어들여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변명을 하는 것도 물론 봤고.
하지만 그 당시 침략 전쟁을 치르면서 한껏 정치적으로 이용한 행사와, 그 행사에 사용된 음악을 별 성찰없이 리바이벌해 연주회와 음반으로 생명력을 되살리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좋게 봐줄 수가 없다. 물론 그네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기를 얻지 못하고 다시 사그라든다면 그것도 나름대로의 (당연한) 운명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