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졸업 학점 사수를 위해 교양 과목으로 '러시아어' 를 덜컥 넣어 듣고 있는데, 키릴 문자부터 상당한 압뷁을 주는 데다가 명사의 성이라던가 서양 언어와는 좀 다른 단어 배치 등으로 인해 우왕ㅋ굳ㅋ.
아무튼 완전히 말아먹은 중간고사의 상처를 뒤로 하고, 예정이 잡혀 있다던 러시아 음식점 탐방을 지난 주 금요일에 떠났다.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 사마리칸트' 라는 곳이었고.
저 집이 소개된 기사를 꽤 오래 전에 딴지일보에서 봤었는데, 다만 어디 있는지 도통 모르고 있다가 몇 달 전엔가 집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찾기 위해 이 골목 저 골목을 돌면서 우연히 들어가게 됐다. 골목으로 통하는 큰길도 사실 큰길이 아닌 2차선 도로인 데다가, 사람의 통행도 비교적 많지 않아서 초행길인 사람은 낭패를 보기 십상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한국말로 '여기 어떤거 팔아요?' 라고 하자 종업원은 단 한 마디의 알아들을 수 있는 응답도 하지 못하고 러시아말인지 우즈벡말인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가게 안에서는 뭔가 수상쩍은 차림새의 아저씨랑 아줌마들이 보드카를 몇 병씩이나 비우면서 거의 말싸움 하듯이 떠들어대고 있었던 터라, 그 분위기에 압도돼서 그냥 나왔었다.
그래도 가게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봉을 맡았는데, 심지어 교수님마저 헤매고 계셨던 터라 졸지에 내가 '선지자' 가 돼버렸다. 일단 큰길이 아닌, 예전에 봐둔 지름길을 통해 들어갔다. 다만 그 지름길이 모텔 등 좀 수상쩍은 곳을 통과하는 곳이었던게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물론 교수님은 러시아어가 당연히 유창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문은 교수님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가 헛탕쳤을 때와 달리 종업원들이 약간의 한국말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상태였다. 어쨌든 수많은 학생들이 나름대로 '쇼부를' 봐서 이것저것 골라잡아 시켰다. 다음 짤방들은 내가 속한 조에서 고른 음식들이고;
음식을 시킨 뒤 가장 먼저 내온 빵조각들. 빵을 말린 건지 아니면 원래 딱딱한건지는 몰라도 입에서 녹여먹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심 기대했던 호밀로 만든 시큼한 흑빵도 아니었고. 하지만 호밀을 구하기 힘든 한국에서 거기까지 기대하기는 무리다.
그리고 같이 내온 양파절임(아마도). 밑의 소스는 색깔이 뭔가 간장과 비슷했는데, 맛은 아니었다. 어쨌든 비주얼로만 봐서는 러시아 음식이라기 보다는 가게의 이름대로 우즈벡이나 여타 중앙 아시아 공화국들의 음식같아 보이는 동양풍 요리들이 많았다.
한러 병용 메뉴판에서 한국어로는 '당근 샐러드', 러시아어로는 '까레이스끼 쌀라트' 라고 되어 있는 음식(2000\). 아마 고려인들이 널리 퍼뜨린 것 같았는데, 맛은 당근맛(그것도 살짝 데친 듯한 당근에 기름과 식초로 간을 한 것이었음. 당연히 패스. OTL).
한국어로는 '고기 감자 샐러드' 라고 된 음식(2000\)...인데, 먹어본 사람들 말로는 고기가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생당근과 오이라는 '악마의 음식' 이 함유되어 있어서 이건 시험삼아 먹어보지도 못했다. OTL
정체 불명의 양념장. 색깔을 봐서는 매콤한게 아닐까 하고 빵을 찍어 먹어봤는데, 맵지는 않고 좀 짭짤했다. 재료가 뭔지 궁금한 물건.
샐러드 러쉬의 마지막 메뉴인 '빨간무 샐러드(러시아어 메뉴에는 '비녜그례뜨' 라고 되어 있었음. 2000\)'. 비트라고 하는 빨간 사탕무와 양배추, 피클을 채쳐서 식초와 식용유를 친 샐러드였는데, 이건 조금 먹었다. (물론 피클 패스) 개인적으로는 피클 빼주면 가장 먹을 만한 샐러드라고 생각됐다.
편식크리로 인해 샐러드를 정말 성의없게 깨작거린 뒤, 차를 마시며 다음 요리를 기다렸다. 차는 보리차 비슷한 색깔이었는데, 향은 재스민티 비슷했다. 그리고 이 차가 왜 중요한지는 다음 순서부터 알게 됐다.
원래 러시아 전통 만두인 '뻴메니' 를 먹으려다가 더 양이 많고 맛있다는 교수님의 추천에 힘입어 주문한 '왕만두(만띄. 5000\)'. 커다란 만두 다섯 개가 접시에 담겨져 나왔는데, 중앙의 마요네즈 비슷한 것이 바로 러시아 요리에 빠지지 않는다는 '스메따나(사워 크림)' 다. 원래 스메따나는 그리 시지도 않은 생크림 맛인데, 저기 첨가된 스메따나는 확실히 신맛이 났다.
만띄는 엄밀히 따지면 러시아 음식은 아니고, 중앙 아시아 음식이라고 한다. 다진 고기에 가한 향신료에서 좀 특이한 냄새가 났는데, 몇몇 학생들은 그 냄새에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고. 나는 오히려 꽤 괜찮다는 느낌이었다.
만띄와 거의 동시에 나온 보르쉬(한국어 메뉴판에는 '야채 소고기스프' 라고 되어 있음. 5000\). 쇠고기와 커다랗게 썰어넣은 감자, 양배추, 당근, 양파, 사탕무 다진 것을 넣고 푹 끓이는 수프라는데, 워낙 보편화가 되어 있는 데다가 '풀 메탈 패닉' 에서는 칼리닌의 손에 나조잼 또는 쿠스하 드링크와 필적할 만한 괴식으로 패러디되기도 했고.
여기에도 역시 스메따나가 한 숟갈 뿌려져 나왔는데, 섞어보니 영락없는 딸기우유 색깔인 분홍색이 되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비주얼이었는데, 일단 조심스레 떠먹어 보니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마치 고깃국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만 스메따나의 위력 때문에 뒷맛이 느끼했고.
다시 한 번 만띄와 보르쉬. 내가 속한 조에서 시킨 것들 중에는 가장 맛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것들도 그렇고.
양고기 샤실리크(2500\). 닭꼬치와 비슷한 비주얼인데, 이것 역시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앙 아시아 지역에 널리 알려진 요리라고 한다. 양고기 비린내가 걱정되기는 했는데, 오히려 고기 비린내 보다는 향신료 냄새가 꽤나 강했다. 이것 역시 향신료때문에 버로우한 학생들이 속출했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먹을만 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쇠고기 샤실리크(2000\). 양고기와 달리 곱게 갈아 양념과 함께 반죽한 것을 꼬치에 끼워 구워낸 것인데, 이것도 향신료 냄새가 강했고.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양고기가 더 맛있었다.
두 샤실리크 모두 얇게 썬 양파와 마늘이 곁들이로 나왔는데, 주의할 점은 메뉴판 사진에 네 개씩 담겨져 있어서 '무지 싸구만' 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다가는 접시에 위 짤방들처럼 한 꼬치씩 나오는 광경을 보면서 좌절해야 한다는 거.
그 외에 사진은 못찍었지만 옆 테이블에서 남긴 양갈비찜(6000\)도 먹어봤는데, 이것도 향신료 냄새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 덕분인지 비린내는 없었다. 그리고 '생크림빵' 이라고 해서 주문했다가 낚인 패스츄리 비슷한 빵(2000\)도 있었는데, 짐작컨대 반죽할 때 스메따나를 넣고 여러 겹으로 얇게 포개 구운 빵 같았다. 아무튼 낚이긴 했지만 이것도 꽤 맛있었고.
그리고 비용이 남아서 마지막에 교수님이 시키신 보드카(!!!). 칵테일로는 블랙 러시안이건 스크류 드라이버던 블러디 메리건 간에 마셔본 적 있었지만, 보드카만 스트레이트로 마셔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듣기로는 '무색, 무취, 무미' 라고 했었는데, 색은 무색이었지만 냄새는 확실히 있었고 맛은...소주와 비슷했지만 훨씬 강했다. 러시아인들이 왜 보드카를 그렇게 필요로 하는지 알 것 같았는데, 잔을 비우고 나자 배가 뜨뜻하게 데워지는 난로 효과 때문인 것 같다.
보따리 장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인 만큼 저렴한건 사실인데, 위에 계속 쓴 것처럼 정통 러시아 요리가 아닌 중앙 아시아식으로 변형된 요리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통주의자' 인 사람들에게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좁다란 골목에 비슷한 이름의 가게-사마르칸트, 사마리칸트, 사마루칸트-가 세 개나 붙어 있는데, 세 곳 모두 같은 집이고 메뉴도 똑같으니 어딜 들어가도 상관없다.
대부분의 약도에는 동대문운동장역 2호선 출구 쪽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빠르고 손쉬운 경로는 오히려 5호선 출구 쪽이다. 4호선 구간과도 연동되어 있는 5번 출구 쪽으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돈 뒤 어중간한 2차선 도로를 건너 왼쪽으로 좀 가다 보면 주황색의 조그마한 직사각형 간판에 키릴 문자로 가게 이름이 쓰여 있는걸 볼 수 있다.
아무튼 한중일양식 떠나서 좀 특이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한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다시 어중간한 2차선 도로 쪽으로 나와서 오른편으로 가다가 길을 건너면 러시아 빵과 케이크류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도 있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고 러시아어 교수님도 모르시는 곳이라 다음 기회에 용기를 내서 가볼 예정. (하지만 거기서도 한국말 안통하면 GG. lll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