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 를 서비스하고 있는데, 그래서 음악자료실에 가면 일단 바쁜 일이 없는 경우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이것저것 선곡해서 듣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을 때울 수 있을(???) 정도다. 낙소스 외에도 비스나 샨도스, CPO, 헨슬러 등 상당히 많은 다른 마이너 음반사들도 음원을 내놓고 있어서 날이 갈 수록 음원 목록이 방대해지고 있는데, 때로는 그 물량에 눌려 지치기도 하고 있고.
특히 샨도스의 경우에는 레어 아이템의 발굴을 낙소스 만큼이나 의욕적으로 하고 있어서 나름대로 인정하는 음반사인데, 검색을 하다 보니 구미가 당기는 앨범이 하나 서비스되고 있었다.
ⓟ 1980 Chandos Records Ltd.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브라스 밴드용 합주용 작품을 모아놓은 CD였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브라스 밴드' 는 타악기를 제외하고는 관악기를 전부 금관으로 사용하는 '영국식' 개념이었다. 목관 합주용 작품 전곡은 이미 예전에 레어 애청곡선에서 다뤘듯이 에도 데 바르트 지휘의 네덜란드 관악 합주단의 녹음을 필립스의 듀오 시리즈로 입수했는데, 금관 합주 작품만 다룬 음반도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물론 오자와 세이지가 빈 필을 지휘해 '알프스 교향곡' 같은 대곡을 녹음할 때 곁다리로 몇 곡 끼워 녹음한 적은 있지만, 금관용 작품만을 모아 음반을 낸 예는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유일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당대 최고의 호르니스트로 평가받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영향도 있어서 일찍부터 관악 음악이 가진 가능성에 주목했던 작곡가였는데, 굳이 관악만의 편성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관현악을 다루면서 관악부를 대단히 다양하고 화려하게 취급해 특유의 변화무쌍한 사운드를 만들곤 했다.
다만 목관이던 금관이건 간에 관악 합주용으로 만든 작품들이 대개 교향시나 오페라 등의 걸작에 가려 빛을 못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 와중에서도 아주 대담하게 내놓은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연주자들이 아닌, 영국 연주자들이 결성한 단체인 '로크 브라스 콘소트(Locke Brass Consort)' 가 제임스 스토바트(James Stobart)의 지휘로 1979년 1-2월에 녹음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영국은 의외로 금관 음악에 강세를 보이고 있는 나라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 에서 보듯 영국 각지의 수많은 아마추어 브라스 밴드들이 이런저런 경연대회에 참가해 엄청난 연주력을 과시하고 있는데, 저 단체는 영국 유수의 프로 관현악단들에서 수석 혹은 부수석을 역임하거나 역임하고 있던 유명 주자들이 모여 만든 만큼, 연주력 면에서 우려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트라우스의 금관 합주 음악은 특정 행사를 위해 작곡한 소위 '의전 간지용' 의 기회 음악이 대부분인데, 이 앨범에 들어 있는 곡들이 슈트라우스의 금관 합주곡 전곡이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수록곡은;
빈 시의 축전음악 TrV 286 (Festmusik der Stadt Wien, 1943)
왕실 제 1기병연대를 위한 축전 행진곡 제 1번 TrV 213 (Parade-Marsch Nr.1 des Regiments Königs-Jäger zu Pferde, 1905. 원곡은 피아노곡)
기병대를 위한 축전 행진곡 제 2번 TrV 222 (Parade-Marsch Nr.2 für Kavallerie, 1907. 원곡은 관현악곡)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팡파르 TrV 248 (Wiener Philharmoniker Fanfare, 1924)
빈 시의 음악주간 개막식을 위한 팡파르 TrV 250 (Fanfare zur Eröffnung der Musikwoche der Stadt Wien, 1924)
요한 기사단 단원들의 축전 입장곡 TrV 224 (Feierlicher Einzug der Ritter des Johanniter-Ordens, 1909)
올림픽 찬가 TrV 266 (Olympische Hymne, 1934. 원곡은 합창과 관현악)
*TrV(Trenner-Verzeichnis):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구가인 음악학자 프란츠 트레너(Franz Trenner)가 정리한 작품들의 일련 번호. 공식적인 작품 번호가 붙은 곡들도 포함하는 등 종래의 AV(Asow-Verzeichnis)보다 더 포괄적이고, 작곡 시기 분류도 정확해 많이 보급되고 있음.
모두 다 합쳐도 총 수록 시간이 40분도 채 안되는데, 그나마 오리지널 금관 합주용 작품은 네 곡 뿐이고 나머지 세 곡은 위에 써넣은 것처럼 다른 편성의 작품들을 편곡한 것들이다. 행진곡 두 곡은 악단의 베이스 트롬본과 테너 튜바 연주를 맡고 있는 레슬리 레이크(Leslie Lake)가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편곡판을 편집한 악보로 녹음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곡인 '올림픽 찬가' 는 편곡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슈트라우스 자신이 편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기회 음악인 만큼 곡에서 어떤 심오한 의도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연주할 수 있는 곡들도 아니다. 악기 용법에 있어서 어떤 작곡가보다도 더 통달하고 있었던 인물의 작품인 만큼, 각 파트에 요구하는 기교의 수준이 대단히 높은 편인데, 이름부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금관 단원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팡파르' 같은 곡들이 난곡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빈 시의 축전음악' 은 슈트라우스의 오리지널 금관 앙상블 곡 중 가장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하는데, 길이도 그렇지만 특별한 악기 배치를 요구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빈 필과 빈 교향악단, 빈 국민오페라 관현악단의 금관 주자들이 결성한 앙상블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금관 그룹을 좌측열-트럼펫 5/트롬본 3/튜바-과 우측열-트럼펫 5/트롬본 4/튜바-로 나누고 그 사이에는 팀파니를 넣어 일종의 안티폰 효과를 노리고 있다.
물론 금관 앙상블 특유의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적극 추천할 만한 앨범이기는 하지만, 몇몇 작품들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적 위험성' 도 지적할 수 있다. '올림픽 찬가' 의 경우에는 나치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 축전을 위해 작곡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연주 기회가 별로 없는 곡이며, '빈 시의 축전 음악' 도 히틀러 유겐트 최고 지도자이자 빈 대관구 장관이었던 발두르 폰 시라흐가 개최한 '선심성' 축전의 개막식을 위해 작곡된 만큼 그렇게 영예로운 작품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뒤늦게 관악 음악이 가진 매력을 조금씩이나마 알아가고 있는데,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 만으로는 만족하기 힘들도 아무래도 CD 자체를 지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샨도스의 한국 수입사인 신나라레코드의 체인을 뒤져본 결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마존 등을 통한 해외 구매를 신청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걸리고. 아무래도 저 한 장을 위해 엄청난 배송료를 감당하기가...lllOTL
*음원은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의 'Free Preview' 로 들어간 뒤 Keyword Search에서 'CHAN8419' 이라고 치면 나오는 음반) 단, 비회원인 경우 15분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15분 지나서 자동 로그아웃 되면 재로그인을 해야 다시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