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온 헤르베르트 하프너의 평전 '푸르트벵글러' 가 반갑기 그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생전의 라이벌이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 대해서는 이덕희가 쓴 책이 '현대 예술의 거장' 이라는 총서에 포함되어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재판을 거듭하고 있는데 반해 푸르트벵글러에 관해 쓰여진, 혹은 그 자신의 글로 이루어진 단행본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푸르트벵글러에 관한 기사나 에세이 등의 단문들은 '객석' 을 비롯한 예술 관련 잡지들에서 그리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며, 지금은 폐간된 '레코드포럼' 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박진용이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 비교를 화두로 상당히 길게 연재하기도 했다. '까는' 어조가 상당히 강한 로베르트 바흐만의 비판적 카라얀 평전에도 1930-50년대 부분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언급되었고. (다만 정치적인 태도와 밴댕이 소갈딱지 때문에 까인건 거의 카라얀과 마찬가지였음)
나도 최근까지는 저 하프너의 평전이 국내에 출간된 유일한 푸르트벵글러 관련 단행본인줄 알았다. 하지만 우연찮게 검색을 해보다가, 이미 절판된지 오래된 문고본이기는 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직접 쓴 책이 이미 나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남산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서고를 뒤지게 하는 수고를 시키면서까지 빌려 왔다. '삼성문화문고' 라는 시리즈의 단행본이었는데, 크기가 손바닥 조금 넘어갈 정도로 상당히 작았다. 그리고 삼성이라는 한자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삼성그룹 산하의 '삼성미술문화재단' 이 출판사였다.
원서는 푸르트벵글러가 타계하기 직전인 1954년 10월에 비스바덴의 브로크하우스 출판사(Bibliographisches Institut & F. A. Brockhaus AG)에서 출판된 '음과 언어(Ton und Wort)' 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이었는데, 아직 30대 초짜였던 만하임 궁정극장 지휘자 시절부터 출판 직전에 쓴 글까지 상당히 폭넓은 시기의 저작물이 시대 순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참고로 브로크하우스는 1805년에 설립된 꽤나 고참 출판사인데, 1810년에 발행한 '회화사전' 에 베토벤이 프로이센 왕의 사생아라고 적었다가 베토벤 본인과 친구 베겔러에게 엄청나게 태클을 먹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출판사 사장이자 푸르트벵글러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재임 시절부터 친분을 맺고 있었던 막스 브로크하우스(Max Brockhaus)가 써준 서문을 제외한 수록 저작 목록은;
1. 베토벤의 음악에 관하여 (1918)
2.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음악에 대하여 (1919)
3. 암보 지휘에 대하여 (1926)
4. 오해받은 바그너 (1931)
5. 음악의 생명력 (1931. 번역본에는 저술 연도 표기가 없음)
6. 요하네스 브람스 (1931)
7. 괴테 (1932)
8. 바로크 음악의 연주에 대하여 (1932)
9. 음악위기에 있어서의 고전파 작곡가들 (1932)
10. 하이든의 독일 선율 (1932)
11. 독일 국민의 예술 (1933)
12. 작품해석에 대하여 (1934)
13. 힌데미트 위기 (1934)
14. 음과 언어 (1938)
15. 바그너 문제-니체 풍의 수상 (1941)
16. 베토벤의 세계적 가치 (1942)
17. 낭만주의의 성찰 (1943)
18. 푸르트벵글러에게 물어보다 (1950)
19. 바흐 (1951)
20.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 (1954)
저작물들은 대부분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나치 정권의 예술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힌데미트 위기' 는 오히려 그 자신의 위기 요소가 되었던 점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에세이 외에는 베를린 필 창단 50주년 기념 축전에서 행했던 강연록(9), 선전성 장관 요제프 괴벨스에게 보낸 편지(11), 베를린 필과 순회 공연 중 가진 인터뷰(18)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개별 저작들의 제목에서 보듯, 푸르트벵글러가 평생을 두고 자랑스러워 했던 '독일 민족의 위대한 작곡가' 들에 대해 쓴 것이 많다. 특히 15번의 '바그너 문제' 는 가장 길고 복잡한 저작물로, 골수 바그너 '빠' 에서 '까' 로 돌아선 니체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순수예술론' 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푸르트벵글러 자신이 직접 쓴 글들이므로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없지만, 몇몇 주장들은 이미 구닥다리가 된 것도 있고-가령 8번의 경우에는 원전연주 혹은 정격연주 음악인들의 서릿발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집안의 건방진 아들로 자라난 탓에 일종의 전근대적인 '선민 의식' 이나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비판 등 은연중에 약점이나 모순을 드러낸 부분도 종종 보인다.
바리톤 가수로 유명했던 황병덕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중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로 '티롤(Tirol)' 을 일본식 표기인 '치로루' 라고 해놓은 주석 문구가 10번 글에 붙어 있는데, 그 외에도 시대 상황에 따른 외국어 표기나 한자 혼용, 일본식 표현이 농후한 관용구 등이 많아 읽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읽기 어려움이 번역 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는게, 푸르트벵글러 저작들의 대부분이 자작곡들에서 보여준 그 기나긴 프레이징처럼 꽤 장황한 탓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조이클래식이나 레코드포럼, 객석 등에 짤막하게 번역된 각종 저작물들을 비교해 보면 푸르트벵글러도 전쟁 전후에 보신을 위해 상당히 말을 많이 바꿨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프너의 평전에도 비판적인 어조로 지적되고 있다.)
번역의 구티나 원문의 장황함과 더불어, 작지만 번역본에서 나온 또 하나의 충격과 공포는;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을 위한 부가 짤방을 더하자면;
스꾸임~~~???
...그래도 뭔가 이상한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고. 그리고 남산도서관 외에 학교 음악자료실에도 비치되어 있는 걸 추가로 확인했는데, 거기 있던 것도 똑같은 충격과 공포였다. 하여튼 편집자 혹은 교정자, 나랑 다투자.
p.s.: 하프너의 푸르트벵글러 평전 가격(36000\)에 떡실신. 알바할 여유가 생기는 방학 때까지는 학교 도서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차선책으로는 헌혈 12회라는 특단의 조치가 있지만, 아직 그렇게 될 정도로 정신줄은 안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