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 후 정신없이 바쁜 탓에 사실상 빈집이 되고 있지만, 그나마 짬을 내서 '셜리' 가 내일 정발 예정이라는 것에 '필 충만해' 예전에 다른 곳에 썼던 글을 재탕합니다.
일본 만화가들 중에 모리 카오루 여사는 원래 건축학도였다가 취미로 메이드 동인지 그리던 게 밥벌이가 된 케이스인데, 특히 첫 장편작이자 대표작이 된 '엠마' 단행본들의 후기를 보면 '이 여자, 조금만 더 덕후도 높아지면 정신줄도 놓겠는데'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아무튼 그 '메이드' 에 대한 열정때문에 연재물로서는 캐쥐약 설정들인 복잡다난한 레이스나 벽지 무늬까지도 어떻게던 그려낼 정도이니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메이드 관계의 미디어는 국내외 가리지 않고 거의 다 섭렵하는 뽕빨 정신도 물론이고.
모리 여사가 나름대로 메이드에서 가지치기해서 클래식 쪽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가령 2권 말미부터 등장하는 도로테아 묄더스라는 아줌마부인 캐릭터는 외모를 전설적인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리고 4권에서는 윌리엄개색히과 엘레노어가 극장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를 보는 장면도 꽤 오랫동안 나오고 있고. (듣자 하니 일본에서 나온 최신간인 '엠마' 9권에서는 오페라 출연 가수들의 에피소드도 나온다고 한다)
내용이 가장 어둡고 심각한 캠벨 자작-이 작품에서 가장 뚜렷한 악역임-관련 내용의 배경도 오페라극장이 종종 설정되는데,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와 '맥베스' 를 보는 장면이 잠깐 나오고 있다. 모리 여사 말로는 '바리톤은 레오 누치가 좋다' 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티토 곱비 앞에 닥버로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리고 정규 연재분의 마지막인 7권 후기에는 '드림라이프 오페레타' 라는 물건이 잠깐 언급되는데, 이 '뻘글' 의 주제가 바로 이 물건이다.
드림라이프(Dreamlife)라는 회사는 일본의 클래식 영상물 전문 제작/판매 업체로, 40년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다. 대충 시간을 따져 보면 비디오 카세트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칼 뵘이나 카라얀 같은 클래식 대가들의 영상물 일본 라이센스 제작/보급권을 일찌감치 따내면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한다.
그렇게 권리를 마구 따낸 덕에, 저 회사는 심지어 원본 필름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시판하고 있지 않는 '일본 한정 로컬 DVD' 까지 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저 드림라이프 DVD에 욕심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풍월당에서도 몇몇 타이틀을 특별히 독점 수입해올 정도라고 하고.
모리 여사가 언급한 '드림라이프 오페레타' 라는 시리즈도 마찬가지인데, 18개 타이틀 중 하나 빼고는 전부 세계 최초 DVD화(!!)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원본 필름들은 독일의 유니텔(Unitel)에서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찍은 오페레타 영화들인데, 드림라이프가 일본 한정으로 선점한 뒤에 도이체 그라모폰(DG) 등에서 몇몇 타이틀을 조금씩 인터내셔널 릴리즈로 내고 있는 실정이다.
오페레타라는 장르 자체가 시작부터 '여흥' 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그 대중성을 20세기에 되살리자는 것이 유니텔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라면 이미 오페레타를 버로우시킨 뮤지컬 때문에 그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던 것 같고. 아마 그 때문에 유니텔이 일본 회사에 판권을 무더기로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지금까지 발매된 드림라이프 오페레타 시리즈를 열거하면;
1.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 아름다운 엘렌 (독일어판. Die schöne Helena. 1974년 제작)
2. 에메리히 칼만(Emmerich Kálmán): 차르다시 공주 (Die Csárdásfürstin. 1971년 제작)
3. 프란츠 레하르(Franz Lehár): 미소의 나라 (Das Land des Lächelns. 1974년 제작)
4. 프란츠 레하르: 쥬디타 (Giuditta. 1970년 제작)
5.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Sohn): 베네치아의 하룻밤 (Eine Nacht in Venedig. 1973년 제작)
6.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쥐 (Die Fledermaus. 1972년 제작)
7. 프란츠 레하르: 룩셈부르크의 백작 (Der Graf von Luxemburg. 1972년 제작)
8. 프란츠 레하르: 파가니니 (Paganini. 1972년 제작)
9. 에메리히 칼만: 마리차 백작부인 (Gräfin Mariza. 1973년 제작)
10. 에메리히 칼만: 서커스의 여왕 (Die Zirkusprinzessin. 1969년 제작)
11. 레오 팔(Leo Fall): 달러의 여왕 (Die Dollarprinzessin. 1971년 제작)
12. 리하르트 호이베르거(Richard Heuberger): 오페라 무도회 (Der Opernball. 1971년 제작)
13.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빈 기질 (Wiener Blut. 1971년 제작)
14.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집시 남작 (Der Zigeunerbaron. 1975년 제작)
15. 프란츠 레하르: 집시의 사랑 (Zigeunerliebe. 1974년 제작)
16. 프란츠 레하르: 러시아의 황태자 (Zarewitsch. 1973년 제작)
17.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쥐 (1987년 제작. 실황녹화)
18. 프란츠 레하르: 유쾌한 미망인 (Die lustige Witwe. 1994년 제작. 실황녹화)
저 타이틀들 중 모리 여사가 7권 후기에서 언급한 것이 12번의 호이베르거 작품이고, 유달리 '박쥐' 같은 경우에는 6번(칼 뵘 지휘)과 17번(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두 종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17번은 이미 DG에서 나온 적이 있었지만, 2004년에 타계한 클라이버 추모용으로 특별히 로컬 제작한 것이다. 모리 여사도 나름대로 좋아하던 지휘자였는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 일기에 클라이버의 서거 소식을 따로 적기도 했고. (지금도 볼 수 있음)
모리 여사가 특별히 저런 오페레타에 버닝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엠마' 의 시간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에 쓰였거나 그 시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몇몇 작품에서는 모리 여사가 그렇게 거품을 무는 '메이드' 캐릭터도 등장하고 있고.
가령 '박쥐' 같은 경우에도 엄연한 집안 마님인 로잘린데를 제치고 메이드인 아델레가 여성 캐릭터로는 가장 먼저 나와서 노래하고 있다. 사실 저 '아델레(Adele)' 도 모리 여사의 캐릭터 작명에 영향을 미쳤는데, 묄더스 집안 메이드장 이름이 바로 아델레다. 호이베르거 작품에도 오르탄스라는 메이드 캐릭터가 나온다는데, 그 작품은 서곡 빼고는 들어본 것이 없으니 패스하고.
(참고로 '엠마' 의 한국어 번역판은 독일어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아델' 로 번역함. 심지어 묄더스네 딸아이 이름도 원래 '일제(Ilse)' 인데 일본어 발음인 '이루제' 로 해놓았고. 캐안습 OTL)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도 오페레타들인 만큼 가볍기는 하지만, 몇몇 작품은 의외의 설정과 줄거리를 갖고 있기도 하다. 가령 레하르의 '미소의 나라' 와 '러시아의 황태자' 는 주인공 커플들이 이별하는 '언해피엔딩(배드엔딩까지는 아니므로)' 으로 끝나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집시 남작' 은 슈트라우스 자신이 '오페레타가 아닌 오페라' 라고 끝까지 고집했던 작품이었다.
레오 팔의 '달러의 여왕' 은 막말로 '된장녀 길들이기' 스토리인데, 20세기에 미국 벼락부자들이 유럽 상류사회에 '체통도 없이 들이대면서' 생기던 온갖 트러블이라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칼만의 '서커스의 여왕' 은 재즈나 블루스 등 미국 대중음악 어법을 오페레타에 과감히 들여와 오페레타와 뮤지컬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는데, 1930년대 중반에 나치가 득세하자 '저질 민족의 음악을 들여왔다' 는 이유로 상연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오페레타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본에서 저렇게 판권 싹쓸이 & 세계 최초 러쉬를 하는 것을 보면 배아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나름대로 애호가층이 있으니 만들고 사고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