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하원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 이 통과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정신대 문제' 라는 이슈의 국제화가 한층 더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곁다리로 스기야마 고이치라는 인물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행운(???)도 주어졌고.
비단 위안부 문제 뿐이 아니라, 아직도 지구상에는 전쟁이나 분쟁에 휘말려 삶의 터전은 물론이고, 순결에 목숨까지 빼앗기고 스러진 여성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리고 크라잉 넛의 노래 '더러운 도시' 에서 언급된 '작업복 공순이의 눈물' 도 물론 빠뜨릴 수 없고.
이렇게 역사의 질곡 속에 희생당한 여성들에게 바쳐진 추모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윤이상(1917-1995)의 교향곡 제 4번 '어둠속에서 노래하다(Im Dunkeln singen)' 이다.
ⓟ 1994 Camerata Tokyo Inc.
윤이상이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처음 손을 댄 것은 1983년의 일이었는데, 그 후로 1987년까지 다섯 곡의 교향곡을 남겼고 여기에 두 곡의 실내 교향곡까지 합치면 모두 일곱 개를 남겼다. 각 교향곡은 1년 단위로 연작 식으로 작곡되었음에도 악장 구성과 악기 편성, 연주 시간이 저마다 다르지만, 일종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곡은 1986년에 산토리 음악 재단이 도쿄에 건립한 산토리홀(Suntory Hall)의 위촉으로 작곡되었는데, 개관 당시 포도밭 양식으로 만들어진 베를린 필하모니를 참고한 독특한 구조와, 대기업이 건립한 첫 대규모 공연장이라는 이유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산토리는 일본 굴지의 주류 업계답게 개관 행사를 상당히 화려하게 꾸몄는데, 베를린 필이나 빈 필 같은 세계 유명 악단들의 내일 공연 시리즈를 비롯해 저명한 현대 작곡가들에게 신작을 위촉하는 등의 대규모 기획을 준비했다. 여기에 윤이상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윤이상의 미망인 이수자가 집필한 '내 남편 윤이상' 이라는 책에는 이 곡의 초연을 앞두고 산토리 측에서 윤이상에게 자사의 위스키 광고 출연을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교향곡 4번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또는 7번) '미완성' 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2악장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1악장에서는 상반된 두 개의 음악 요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이상은 관현악곡 작곡 시에 동양의 음양 사상에 착안해서 금관과 타악기에 주로 '어두움' 을 맡기고 현악기에는 '밝음' 을, 그리고 목관에는 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종종 부여했는데, 이 곡에서는 그 '어두움' 과 '밝음' 의 강렬한 대립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윤이상은 자신이 세운 개념을 천편일률적으로 주입시키지는 않고 있다. 가령 실로폰이나 탬버린 등의 고음 계열 타악기는 트레몰로 크레센도 등의 효과로 현악기의 집요한 상승 음형에 더해지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네 마디 단위로 관현악의 악기 편성을 계속 바꿔 가면서 나름대로의 논리성과 다양한 음색을 꾀하고 있기도 하다.
1악장이 상당히 드라마틱하고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선동하는 움직임이 대세였다면, 2악장은 대조적으로 느린 템포와 긴 음가가 지배하고 있다. 현악기를 무자비하게 몰아 세우던 타악기군도 탬버린과 트라이앵글 등의 악기가 현악기에 밝은 색채를 슬쩍슬쩍 입혀주는 역할로 그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팀파니의 트레몰로 크레센도가 슬그머니 끼어들면서 또다시 갈등 양상이 보여지는데, 다만 1악장에서처럼 격심하지는 않다. 음의 움직임은 적은 편이며, 대신 긴 크레센도와 디미누엔도가 반복되면서 조이고 푸는 느낌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곡의 핵심인, 코다 직전의 '4중주' 가 특별히 주어진다. 악장의 시작을 알린 오보에를 선두로 해서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이 차례로 더해지면서 갑자기 실내악으로 전환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뒤이어 붙는 코다는 타악기의 강한 악센트가 더해지면서 굉장히 강렬한 투티 크레센도로 부풀어 오른다.
이 효과는 지금까지 내가 들어 본 윤이상의 교향곡 중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는데, 그 만큼 윤이상이 이 교향곡 작곡에 있어서 감성적인 면을 많이 고려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음악이기는 하지만 분노와 애도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그 감정도 서구에서 추구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표현이었다.
윤이상의 다섯 개 교향곡과 두 개의 실내 교향곡 중 제목이 붙은 곡은 이 4번과 실내 교향곡 2번(자유에 바침. Den Opfern der Freiheit) 뿐인데, 이 곡의 표제는 윤이상이 생전에 각별한 친분을 나누었고 '상처입은 용' 이라는 대담 서적도 출간한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일기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린저는 2차대전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 경력 때문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었고,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일기를 썼다고 한다. 고통과 공포의 기록인 그 일기의 제목을 교향곡의 제목으로 과감히 사용한 것인데, 그 만큼 윤이상은 '억압받는 자' 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인물이었다.
*제목을 빌어 온 린저 외에도 윤이상은 '밤이여 나뉘어라' 와 교향곡 5번에 나치의 탄압을 피해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으로 망명한 유태계 여류 시인 넬리 작스의 시를 텍스트로 사용했고,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친위대원들에 의해 총살당한 지정학자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의 유언시인 '모아비트 소네트' 를 텍스트로 '사선에서' 라는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윤이상의 교향곡 음반은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인데, 1-5번 전집으로 CPO에서 나와 있는 세트(비드고슈치 포메라니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우키가야 다카오)가 그나마 최근까지 유통되고 있는 물건이다. 그 외에 나왔던 품목들로 일본 음반사인 카메라타에서 1번과 '낙양' 을 담은 CD(조선 국립 교향악단 연주), 그리고 2번과 4번을 담은 CD, 국제 윤이상 협회에서 제작한 3번이 담긴 CD(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정명훈) 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국제 윤이상 협회 CD는 아직 국내에 수입되지 못하고 있고, 카메라타의 것도 폐반 또는 절판 상태라 중고 음반점을 알아 봐야 하는 형편이다. 카메라타의 CD에는 게오르크 슈뫼헤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 연주한 2번과 이 4번이 커플링되어 있는데, 특히 4번은 1986년 11월 13일에 산토리홀에서 행해진 세계 초연의 실황이라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한 녹음이다(도쿄도 교향악단/이와키 히로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