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978년 3월 14일
장소: 도쿄 시부야 공회당 (현 시부야 C.C.레몬 홀. Shibuya C.C.Lemon Hall)
협연: 전인성
관현악: 도쿄 시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Tokyo City Philharmonic Orchestra)
지휘: 김홍재
-프로그램-
1부:
최성환(1936-1981): 관현악 '아리랑'
김영규(1927-1989):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윤충남(1945-1981):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2부:
김영규+김윤붕(*1933): 교향곡 '피바다'
앵콜-고종환(*1931): 림진강 (관현악 편곡: 김홍재)
ⓟ 2000 KAC/Shinsekai Recordsha Co., Ltd.
ⓟ 2001 KAC/Victor Entertainment Inc.
*음반: 코리아 아트센터/신세카이 레코드샤 KAC-002 (상단. 김영규+김윤붕/고종환) & 코리아 아트센터/빅터 엔터테인먼트 NCS-260 (하단. 최성환/김영규/윤충남)
(그 외 김영규와 윤충남의 곡을 제외한 녹음은 신나라레코드의 라이센스로 발매되어 있습니다. 아래 짤방 참조.)
ⓟ 2005 Synnara Music Co., Ltd.
재일 한국인 또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이 뒤늦게나마 영화 등을 통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극영화 '박치기' 와 '디어 평양', '우리 학교' 등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재일 조선인의 험난한 역정을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들인데, 이들 작품은 조선인들을 '총련 빨갱이' 같은 경멸조로 칭하던 과거의 시각에서 탈피하는 데 어느 정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음악의 경우에도 매우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금강산가극단 같은 일본 내 조선인 예술단체들의 음원이 담긴 CD가 신나라레코드와 서울음반 등을 통해 발매되는 등, 점차 '개방' 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그리고 음악 쪽을 이야기할 때 빠뜨리면 안되는 이벤트가 바로 이 연주회다.
당시 일본에는 북한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었다. '포클' 이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림진강' 을 리메이크한 것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방송 금지를 수십 년 동안 당했고, 하물며 북한의 창작 관현악 작품은 연주할 (혹은 지휘할) 사람을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일본 음대에 진학한 한 젊은 클라리네티스트가 지휘로 전과하면서, 이러한 기대도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김홍재라는 이름의 이 학생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일본인 스승이었던 츠츠미 슌사쿠의 추천으로 도쿄 시티 필의 부지휘자로 일하고 있었다.
김홍재의 외삼촌이었던 리철우는 '조선레코드사' 를 설립해 일본에 북한의 음악을 알리고 있었던 인물인데, 북한 현지로부터 음원 외에도 악보를 조달해 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북한에서 대표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손꼽는 몇몇 곡들의 총보(풀 스코어)도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에서 연주해 보자는 계획이 싹트기 시작했다.
문제는 북한에서 받은 악보가 단지 총보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관현악단 단원들이 사용할 파트보는 아직 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고, 결국 총보에서 일일이 사보해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연주자와 악단 섭외, 공연장 대관과 홍보 등에 드는 비용 만으로도 빠듯한 상황이었고, 결국은 김홍재까지 사보 작업에 달라붙어야 했다.
김홍재는 사보 작업 외에도 연주회 때 앵콜 곡으로 쓸 노래 한 곡도 편곡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활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파트보도 모두 완성되었고, 협연자로 피아니스트 전인성과 장새납, 저대, 꽹과리, 징 등 민족악기 연주자들이 충원되어 리허설 채비도 갖추었다.
연주회 날짜는 3월 14일로, 제목은 '조선 관현악 특별 연주회' 로 정해졌다. 공연장은 약 2000여 석의 시부야 공회당으로 정해졌고, 연주 곡목은 제목에 걸맞게 모두 북한 관현악 작품으로 짜여졌다.
당시 이 연주회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무척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것이었다. 연주회 개최 소식은 주로 교포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졌고, 연주회 당일에는 모든 객석이 차고도 모자라 입석을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인파들로 혼잡했다. 청중들은 대부분 교포들이었지만, 작곡가 하야시 히카루와 지휘자 도야마 유조 같은 일본 음악계의 중진 인사들도 있었다.
1부의 첫 곡으로는 최성환의 '아리랑' 이 연주되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본조 아리랑' 을 주제로 작곡된 곡으로, 이미 예전에 썼듯이 비통한 단조의 중간부를 거쳐 반살풀이 장단을 타고 흥겹게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애상과 희열의 감정을 동시에 추구하도록 짜여져 있는 작품이다. 다만, 이 곡에서 중요한 독주 악구를 맡는 저대 대신 플루트가 솔로를 연주한 점이 옥의 티였다. (2부의 교향곡 1악장에서는 악보대로 저대가 쓰였다.)
이어진 곡은 김영규의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였는데, 원곡은 '청산리 사람들' 이라는 무대 작품의 마지막 곡으로 사용된 김옥성의 합창곡이었다. '아리랑' 이 민족의 애환을 반영했다면, 이 곡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특유의 낙관성이 추구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원 풍의 서주에 이어 곧바로 꽹과리를 앞세워 농악 장단을 타기 시작하는데, 상당히 힘있고 흥겹게 연출되었지만 베이스 드럼의 소리가 좀 큰 면이 있어서 둔탁하고 무겁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원곡에서는 새납이 연주하도록 한 중간부 솔로는 장새납이 대신 연주했는데, 새납보다는 힘이 좀 떨어지는 듯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량 새납은 북한에서 일본에 지원했던 민족악기에서 빠져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연주된 곡은 윤충남의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였는데, 원곡은 7.4 공동성명을 전후해 성동춘이 작곡한 같은 제목의 노래다. 당시 남북 간에 고조되었던 통일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는 노래인데, 다만 한국에서는 '정치에 악용된 노래' 라고 해서 아직까지도 금지곡으로 묶고 있는 실정이다.
피아니스트 전인성은 당시 조선인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음악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협주곡 치고는 꽤 파워풀한 오케스트라에 라흐마니노프나 차이코프스키 등 러시아 협주곡의 기교를 모방한 독주 파트라는 꽤 어려운 조합의 곡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다만 녹음 탓인지 피아노의 소리가 많이 죽어버린 것이 문제인데, 특히 중간부의 서정적인 부분에서 심하다.
휴식 후 2부에서 연주된 곡은 김영규와 김윤붕이 공동으로 작곡한 교향곡 '피바다' 였는데, 김윤붕이 1악장을 맡았고 나머지 두 악장은 김영규가 작곡했다. 같은 제목의 혁명가극 노래들인 '피바다가' 와 '"토벌" 가' (1악장), '일편단심 붉은 마음 간직합니다' (2악장), '혁명가' 와 '피바다가' (3악장)를 주제로 만들어 졌는데, 서양 교향곡의 형식과는 매우 다르다.
대개 북한 관현악 작품들은 3부 형식 아니면 변주곡 형식으로 만들어 지는데, 이 곡도 예외는 아니다. 김영규가 만든 2악장과 3악장은 3부 형식이고, 김윤붕이 만든 1악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1악장 중간에 저대 독주로 연주되는 '"토벌" 가' 가 '피바다가' 에 비해 좀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아쉬운데, 일단 형식 보다는 '노래 전체를 토막내지 말고 주제로 사용하라' 는 김정일 음악예술론에 입각한 '위로부터의 창작 명령' 이라 더더욱 그렇다.
북한 교향곡들은 '유기성' 을 강조하기 위해 마지막 악장에서 선행 악장들의 주제를 삽입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 곡에서도 3악장 중간에 '피바다가' 의 선율이 등장하면서 항일 투쟁의 의지를 상기시키는 효과도 더하고 있다. 물론 끝맺음은 러시아 혁명가요 풍의 '혁명가' 가 행진 리듬에 실려 장렬하게 연주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감정선을 제대로 살려야 효과적인 곡인 만큼, 김홍재도 다이내믹의 표현이나 템포의 운용 면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표출했다. '"토벌" 가' 연주 때는 악보대로 저대를 사용했고, 2악장에서 좀 신파조로까지 여겨지는 스트링의 취급이나 3악장 말미의 행진 리듬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었다.
불과 한 시간도 안되는 전체 프로그램이었지만, 대부분 동포들이었던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김홍재는 그 환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노래를 앵콜로 들려 주었다. 그 곡이 바로 '림진강(임진강)' 이었고, 지금도 김홍재가 연주회에서 단골로 연주하는 앵콜곡이 되었다.
대부분의 일본 언론들은 이 연주회에 대해 관심없다는 자세로 일관하거나, 약간의 지면을 할애해 보도하는 식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교포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결국 이 '특별 연주회' 는 도쿄 조선중고급학교의 문화체육회관 등을 돌며 몇 차례 더 반복되어야 했다.
그리고 시부야 공회당 공연을 본 하야시 히카루는 1년 뒤 윤이상 작품과 자신의 작품이 연주된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교향곡 '피바다' 를 선택했고, 도야마 유조는 이후 김홍재에게 나고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이 연주회 실황을 이철우가 녹음했고, 얼마 후 조선레코드에서 LP로 (그리고 1990년대에는 CD로) 발매했다. 다만,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했는지 소리가 흐릿하고 초점이 불분명해서 아쉽다. 이후 김홍재의 '한겨레 음악회' 시리즈 등도 계속 녹음되어 테이프 등으로 발매되었는데, 이들 음반의 녹음 상태도 아쉽다.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인해 조선적 동포들이 일본 당국으로부터 계속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김홍재도 그러한 북한 관련 이슈가 터질 때마다 연주회가 취소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개인 홈페이지가 일본과 한국의 극우파와 특정 종교 단체(개O교 계통일 것임)의 사이버 테러로 폐쇄되기도 했고, 지금은 북한에 관한 내용이 거의 제외된 내용으로 재개장되어 있다.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을 북한 작품의 초연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인과응보' 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쉽게 비아냥거릴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평가 기준에 이념을 앞세우고 '재일동포의 일은 일본 정부가 알아서 하라' 는 식으로 방임한 것이 한국 정부였고, 또 '조선적 동포=조총련계 친북 공산주의자' 라는 도식을 창작하기도 한 것이 한국 언론들이었기 때문이다.
김홍재는 2000년의 ASEM 축제 이후 부정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연주회를 지휘하고 있는데, 올해는 3월과 6월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공연했고, 이어 6월에 울산 시립 교향악단, 7월에 대구 시립 교향악단과의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다. 특히 대구는 자신의 본가가 있다고 해서 언젠가는 가 보고 싶다고 밝혔던 곳인데, 이변이 없는 한 두 공연때 모두 공연장에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