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목관 합주 작품 전집과 브루노 호프만의 글라스 하프 CD를 구입했던 황학동 벼룩시장 골목의 '돌레코드'. 찾아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구하기 힘든 중고 CD가 가는 족족 발견되는 곳이다. 어찌 보면 회현동 지하상가보다도 더 입수 빈도가 높다고까지 생각되는데, 이번에도 아주 특이한 CD를 한 장 구했다.
1969년에 단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내세운 '신성 일본 교향악단(新星日本交響楽団. 이하 신성 일향)' 이라는 새로운 관현악단이 창단되었는데, 일본 최초로 시도되는 운영 방식이라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의 관현악단들은 대개 NHK나 문화방송(분카호소), 후지 텔레비전 등의 방송사 혹은 기업 등이 지원하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1970년대에 이르러 다른 악단들도 취하게 되었는데, 1972년 3월에 문화방송과 후지 텔레비전의 재정 지원이 끊기자 악단 분열 사태까지 발생했던 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단원들과 후원회 공동의 자주 운영 악단으로 재출발했다. 분열 사태 때 일본 필에서 떨어져 나온 주자들이 결성한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였고, 재정난으로 두 번이나 해산되었던 도쿄 교향악단도 자주 운영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자주 운영 악단이었던 신성 일향은 1990년대 들어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고, 결국 2001년에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흡수/통합되는 형식으로 해산되었다. (그 때문에 도쿄 필은 현재 일본에서 최다 단원을 보유한 악단이 되었다.)
입수한 CD는 신성 일향이 해산되기 전에 내놓은 것들 중 하나인데, 1994년에 일본 빅터 레코드에서 제작된 시리즈 '재미있는 오케스트라(おもしろオ―ケストラ)' 라는 시리즈 앨범 중 2집이었다. 서브 타이틀은 '오케스트라 인 라틴~남미의 오케스트라 음악' 이었는데, 최소한의 수준으로 갖추고 있던 일본어 독해 능력이 없었다면 찾아내지 못했을 물건이었다. (게다가 CD 케이스 앞면은 웨스트라이프의 것으로 땜질되어 있어서 더욱 헷갈렸다.)
ⓟ 1994 Victor Entertainment Inc.
'재미있는 오케스트라' 는 신성 일향이 1993년에 개최했던 특별 기획 연주회 시리즈였는데, 이 시리즈의 프로듀서가 바로 '이누야샤' 와 '사무라이 7', '디 그레이맨' 등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한 와다 카오루(和田薫)였다. 와다는 특별히 이 시리즈를 위한 테마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고, 메들리 편곡과 프로그램 노트 편집 등을 손수 맡기도 했다.
2집은 7월 18일에 도쿄 예술극장에서 열린 연주회의 실황 일부를 녹음한 것인데,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의 '엘 살롱 메히코(El Salón México)' 와 와다가 편곡한 '삼바 카니발 메들리', 빌라-로부스(Heitor Villa-Lobos, 1887-1959)의 '브라질풍의 바흐(Bachianas Brasileiras)' 제 5번, 히나스테라(Alberto Ginastera, 1916-1983)의 발레 모음곡 '에스탄시아(Estancia)' 가 수록되어 있다.
메들리의 경우에는 '호다 데 손(Roda de Son)' 이라는 이름의 5인조 라틴 타악 그룹이, 빌라-로부스 곡은 소프라노 가메다 마유미(亀田真由美)가 협연했고, 지휘는 1982-87년에 신성 일향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던 사토 고타로(佐藤功太郎)가 맡았다. 협연자와 지휘자 모두 정보가 별로 없는데, 다만 지휘자인 사토는 작년(2006년) 6월에 십이지장암으로 타계했다고 한다.
특별히 편곡된 삼바 메들리를 제외하면 세 곡 모두 라틴아메리카계 레퍼토리의 명곡들인데, 다만 이 곡들은 모두 리듬이 꽤나 까다로운 편이라 동양권에서는 '인기는 있되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 곡들에 속한다. 그러한 곡들을 과감히 시리즈로 묶어서 연주한 것인데, 물론 일본 오케스트라의 한계가 노출되는 대목이 종종 있다. 가령 '에스탄시아' 의 1악장에서 트럼펫이 들어가기 전까지 엇박을 소화하지 못하고 자꾸 정박에 두드리는 베이스 드럼이나 4악장에서 자꾸 뒤처지는 탬버린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녹음이 하루 동안의 연주회를 그야말로 '한 방에 녹음한' 것을 감안하면 연주가 그리 많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코플랜드는 그럭저럭 무난하기는 해도 필이 꽂히지 않아 좀 '심심한' 편이며, 빌라-로부스도 썩 나쁘지는 않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나 안나 모포, 네타냐 다브라스 등의 연주와 자꾸 비교하게 된다.
이 앨범에서 많이 듣게 되는 곡은 히나스테라의 모음곡과 와다 편곡의 메들리다. 히나스테라 곡이야 원래부터 좋아했고 '레어 애청곡선' 초기에 다룰 정도였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메들리가 매우 재미있었다.
고전 영화 '흑인 오르페' 에 나오는 '오르페의 삼바' 와 보사노바 대히트곡 중 하나인 '이파네마의 소녀', 그리고 브라질인들이 삼바 축제나 축구 경기 등에서 심심하면 부른다는 '맘마 요 케루(Mamãe eu quero)' 세 곡으로 만든 것인데, 동물 울음소리가 나는 쿠이카(cuica)와 봉고, 호루라기, 카우벨, 마라카스 등의 이국적인 타악기 연주가 앞세워져 있어서 이채롭다. 관현악 쪽에서도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 를 패러디한 클라리넷 글리산도 등이 흥취를 더하고 있다.
'재미있는 오케스트라' 시리즈는 이외에도 '오케스트라 인 스크린(1집)', '뮤지컬 뮤지컬(3집)', '아메리칸 아메리칸(4집)', '판타지 월드(5집)' 와 '일본의 소리(6집)' 등 다섯 종류가 더 발매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미 모두 폐반 상태고 거기서도 이 2집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5집의 경우에는 '질풍! 아이언리거' 나 '우주전함 야마토', 교향조곡 '드래곤 퀘스트 I' 등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니까, 발품을 좀 더 팔아봐야 겠다.
p.s.: 그리고 이 시리즈는 위 짤방에서 볼 수 있듯이 만화풍 그림 커버들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일러스트는 츠루마루 미츠요(鶴丸光世)가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