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난 번 '레어 애청곡선' 의 모차르트편 에서 소개했던 '글라스 하모니카(glass harmonica)' 에 대해 오류가 있었다. 프랭클린이 개량한 것이 글라스 하모니카는 맞지만, 브루노 호프만(Bruno Hoffmann)이 연주/녹음할 때 사용한 악기는 '글라스 하프(glass harp)' 였다. 워낙 귀한 악기라서 정보도 별로 없었는데, 마침 아래 CD를 입수하면서 그 진상(???)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썼던 대로 글라스 하모니카는 프랭클린의 손으로 개량되어 한 세기 가까이 전 유럽을 휩쓴 인기 악기였다. 하지만 이 악기는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에 쓰인 것을 마지막으로 급속도로 인기가 추락해 잊혀지고 말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 에 쓰면서 그 존재가 다시 알려졌다.
브루노 호프만이 글라스 하프를 만든 것도 슈트라우스의 리바이벌에 힘입은 것 같은데, 1929년에 악기 제작에 착수해서 1938년에 4옥타브 음역의 새 악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와인 글래스와 비슷한 모양의 유리종 가장자리를 물에 적신 손가락으로 문질러 연주하는데, 음역은 약 4옥타브이며 평균율로 조율한다.
(↑ 글라스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호프만)
하지만 고안자인 호프만 외에 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제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호프만은 생전에 글라스 하모니카용 작품의 연주 외에도 주터마이스터나 겐츠머, 슈나우벨트 등의 작곡가들에게 신작을 위촉하는 등 보급에 힘썼지만, 명맥의 유지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호프만의 녹음은 현재 유통되는 것이 매우 적은 편인데, 그나마 전집류이거나 폐반된 것들이 많다. 전자의 경우가 지난 번 소개한 모차르트의 작품들이었고, 후자가 이 CD다.
ⓟ 1988 Pantheon/SKC, Ltd.
지난 번 소개했던 정찬우/신수정 콤비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집과 마찬가지로 SKC(현 SK)가 1988년에 제작했던 국산 CD인데, 엄밀히 말해 이 물건은 라이센스반이다. 독일의 판테온(Pantheon)이라는 음반사에서 1981/82년에 제작했다고 되어 있는데, 라이하(Antonín Reicha, 1770-1836)와 토마섹(Václav Jan Tomášek, 1774-1850), 하세(Johann Adolf Hasse, 1699-1783), 나우만(Johann Gottlieb Naumann, 1741-1801), 그리고 모차르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고는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CD 케이스 뒷쪽과 내지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이 CD에 4번 트랙으로 되어 있는 나우만의 작품은 없다. 물론 4번 트랙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 트랙에 수록된 것은 토마섹의 작품이다. 한마디로 토마섹의 작품이 중복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실수인데, 혹시 이 음반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알아두시길 바라는 바이다.
나우만 작품이 없기는 해도, 나머지 작품들도 연주 횟수가 매우 뜸한 것들인 만큼 그 가치는 높이 살 만한 물건이다. 특히 라이하와 하세의 작품은 호프만에 의해 현대에 재연되었는데, 전자는 1979년에 프라하에서 연주되었고, 후자는 분실되었다고 여겨졌다가 1974년에 음악학자 스벤 호스트루프(Sven Hostrup)가 쓴 논문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고 밀라노에서 악보를 찾아냈다고 한다.
라이하의 작품은 '글라스 하모니카와 관현악을 위한 대 솔로(Grand Solo for glass harmonica and orchestra)인데, 모차르트 편에서 작곡의 동기가 되었던 인물인 마리안네 키르히게스너(Marianne Kirchgässner)를 위해 쓰여졌다고 한다. 덧붙여 이 곡은 키르히게스너가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한 마지막 연주회 때 초연되었고, 키르히게스너는 몇 주 뒤에 샤프하우젠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토마섹의 '글라스 하모니카를 위한 환상곡 E단조(Fantasia for glass harmonica in E minor)' 도 키르히게스너와 관계가 있는 작품인데, 키르히게스너 사후 작곡되어 그녀의 무덤에 헌정되었다고 한다. 고전과 초기 낭만주의 사이의 시점에서 작곡된 곡 답게 양대 사조의 영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데, 특히 반음계적으로 처리된 화성 진행이 두드러진다.
이 음반에서 가장 이채로운 곡인 하세의 교성곡(cantata) '라르모니카(L'Armonica)' 는 유럽에서 글라스 하모니카를 위해 작곡된 최초의 곡이라고 추정되는 작품이다. 프랭클린이 만든 글라스 하모니카를 유럽으로 가져온 사람이 런던 출신의 마리안느 데이비스(Marianne Davies)라는 여성이었는데, 1769년에 소프라노 가수였던 여동생 세실리아(Cecilia)와 빈으로 이주하면서 이 악기도 가져갔다고 한다.
데이비스 자매가 이사한 집에는 하세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만들어진 작품이 이 교성곡이라고 한다. 때마침 빈에 있던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식을 위해 지은 축시에서도 글라스 하모니카를 예찬하는 문구를 집어넣었고, 하세가 이 축시를 받아 재빨리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CD 말미에 수록된 모차르트의 작품은 불과 1분 반밖에 안되는 짧은 소품인데, 사실 100% 모차르트의 작품은 아니고 선배 작곡가였던 글룩의 오페라 '알체스테' 에 나오는 아리아를 바탕으로 작곡된 클라비어(clavier. 당시 건반악기를 총칭하는 단어)용 소품이었다고 한다. 호프만이 이를 글라스 하프 용으로 편곡한 것인데, 앨범에는 조성이 E플랫장조로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반음 낮은 D장조다.
라이하와 하세의 작품에서는 파울 앙게러(Paul Angerer)가 지휘한 슈투트가르트 프로무지카 관현악단(Orchester Pro Musica Stuttgart)이 협연했고, 하세의 곡에서는 소프라노 에디트 빈스(Edith Wiens)가 노래를 불렀다. 관현악을 일부러 소편성의 실내 관현악단으로 조정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글라스 하모니카(또는 글라스 하프)의 음량은 작은 편이라서 원곡에서도 관현악 파트와 독주 파트가 따로 놀다시피 하는 대목이 많다.
녹음은 1981/82년 제작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ADD)지만, 듣기에 이상하거나 하는 구절은 없다. 다만 커플링 시의 치명적인 실수는 어떻게 봐줘도 용납이 안된다. 어쨌던 구입한 곳인 황학동 벼룩시장의 중고음반점 '돌레코드' 에 3~4장 가량이 남아 있으니, 수집가 분들께서는 참조하시길. (참고로 정찬우/신수정 콤비의 베토벤 소나타집도 두 장 가량 남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