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후반생에 대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다. 제국음악협회 초대 총재를 역임한 것과, 요제프 괴벨스나 발터 풍크 등 나치 고위급 인사들에게 헌정되거나 정치적 행사의 '물타기' 용으로 전락한 작품들-가곡 '시냇물' 이나 '올림픽 찬가', '일본 건국 2600주년 축제 음악' 등-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보면 참 답답할 따름이다. 슈트라우스는 유태인 혈통의 며느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며느리는 1930년대 말과 전쟁 중에 두 차례나 게슈타포에게 납치된 적도 있었으며, 그 때마다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빽' 을 이용해서 다시 데려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권위를 너무 지나치게 내세우는 바람에 나치와 충돌한 적도 있는데, 나치 집권 초기에는 유태인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와 오페라 '말없는 여인' 을 합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제국음악협회 총재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뮌헨 근교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별장을 부상병 치료와 수용을 위해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나는 이 전쟁을 원치 않았으니 그럴 수 없다' 고 맞서다가 결국 강제로 징발당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사례를 종합해 봤을 때,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슈트라우스가 '기회주의자' 였다고 결론지었다. 사실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인종이고 민족이고를 떠나 항상 '예술적인 질(quality)' 이었으며, 그것은 '연주회의 유료 입장객' 이나 '재능이 풍부한 예술가' 에게 해당되는 판단 기준이었다. 따라서 츠바이크와의 공동 작업도 '유태인 탄압에 대한 반대' 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정권에 의해 강제로 꺾여지면 저항하기 보다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츠바이크와의 연결이 끊어지자 친나치 성향의 문인인 요제프 그레고르를 새로운 오페라 대본 작가로 맞이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전쟁이 패전 쪽으로 가닥이 잡혔을 때에는 위의 별장 징발 건에서 보듯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는 식으로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물론 슈트라우스의 개인적인 입장은 참 난처했을 것이고, 예술에 대한 그의 사고 방식-예술지상주의-과 나치의 정치적인 역이용 등을 생각해 보면 무조건 '깔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패전 뒤에도 슈트라우스가 '개인적인' 목적에서, 그리고 '독일 민족을 위한' 차원에서 계속 음악 활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스럽다.
적어도 전후 유태인 대학살 등의 소식을 듣고 인간적인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변용' 같은 자민족 추모 작품 외에도 유태인 추모 작품 같은 것이라도 만들었을 테지만, 슈트라우스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지나친 이분법적인 사고관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최근의 '요코 이야기' 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아전인수 격인 사례를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예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의를 품고 칼을 휘두른 조폭이 상대방의 저항 때문에 덩달아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나도 피해를 입었는데 억울하다' 라고 해야 하냐는 것이다. 전쟁으로 독일과 일본 등 추축국들도 모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들 대로 자신들이 적으로 삼았던 민족이나 국가에서 전투원도 아닌 수십 수백만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착취했기 때문에 지금도 규탄받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발언은 여기서 접고, 다시 슈트라우스의 후반생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80세가 가까워 오던 슈트라우스는 이미 쇠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고, 독일의 기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 이후로 크게 꺾여 패전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예술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신고전주의에 대한 슈트라우스 식의 접근도 이 때 이루어 졌는데, 지난 번에 소개한 '디베르티멘토' 가 그랬고 이번에 소개할 두 편의 관악 작품인 소나티네 '병자의 작업실에서(Aus der Werkstatt eines Invaliden, 1943)' 와 교향곡 (또는 소나티네 제 2번) '즐거운 작업실(Fröhliche Werkstatt, 1944-45)' 도 마찬가지다.
관악 합주를 위한 작품이라는 분야는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첫 번째 출세 가도를 열어 주었다. 10대 시절에 작곡된 세레나데(op.7, 1881)와 모음곡(op.4, 1884)은 당대의 거물이었던 한스 폰 뷜로에게 호평을 받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뷜로의 추천으로 슈트라우스 자신이 지휘를 맡아 초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가 이 장르에 다시 손을 댄 것은 호른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50년도 더 지나서였다. 그 사이 슈트라우스는 이미 여러 편의 교향시와 오페라, 가곡들을 작곡했으며, 기법도 원숙한 상태였다.
그 시점에서 슈트라우스는 다시 관악 합주라는 영역으로 돌아왔다. 멘델스존이나 슈만을 연상시키던 초기 작품들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분야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작품들을 남긴 모차르트의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실제로 교향곡의 경우에는 모차르트에게 헌정되었다.)
물론 악상 자체는 슈트라우스 식의 조옮김(modulation)이나 불협화음, 반음계 진행 등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에 개성적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세레나데나 디베르티멘토 등의 '여흥 음악' 을 따라가고 있다. 교향곡의 3악장에서는 모차르트 스타일의 악상까지 도입하고 있지만, 결국 슈트라우스의 기법 꾸러미에 편입되어 독특하게 풀어헤쳐지고 있다.
초기작인 모음곡의 2악장과 4악장 서주에서 보여지던 그늘진 악상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작곡자 자신이 즐기면서 만든 곡이라는 티가 확 날 정도로 유쾌함이 가득하다.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전쟁 시기의 취미로 카드 놀이와 관악 합주단 지휘에 몰두했다고 하는데, 이 두 곡도 아마 '취미삼아' 작곡되었을 것이다.
편성도 더 다채로워졌는데, 초기 작품 두 곡의 편성-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호른 4/바순 2/콘트라바순-에 C조 클라리넷(clarinet in C), 바세트 호른(basset horn)과 베이스클라리넷이 더해진 16인의 합주로 짜여졌다. 특히 클라리넷족 악기인 바세트 호른의 경우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이후로 사실상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었지만, 슈트라우스가 리바이벌시킨 악기였다. (악기가 흔치 않아 알토 클라리넷으로 대체하기도 함)
관현악법의 대가였던 슈트라우스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헤켈폰(heckelphone. 바리톤 오보에의 일종), 콘트라베이스 클라리넷 등 해당 악기족들의 최저음 악기나 윈드 머신 같은 의음 악기, 오보에 다모레(oboe d'amore. 오보에와 코랑글레의 중간 음역 악기), 하프시코드, 글라스 하모니카 등의 '고악기' 같은 레어 아이템들을 감초처럼 사용했는데, 바세트 호른의 추가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차르트의 관악 세레나데 중 최대 편성인 '그랑 파르티타' 에서 바세트 호른이 두 대 사용된 것을 벤치마킹한 것일 수도 있고)
슈트라우스의 2차대전 시기 작품들을 살펴보면-물론 '변용' 같은 드문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전쟁 시기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명쾌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 슈트라우스의 음악적인 혁신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심지어 '구닥다리 작품' 이라고 치부해 넘겨도 그만이다. 이 두 작품의 연주 빈도가 무척 낮은 것도 그러한 평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도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다. 모차르트 이래로 거의 사장되어 온 관악 합주라는 전통을 이어받은 드문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즐거움' 이 당시 정세와 슈트라우스 자신의 심경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음악사회학과 심리학 측면에서 고민때리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음반은 상당히 적은 편인데, 필립스(Philips)에서 에도 데 바르트(Edo de Waart) 지휘의 네덜란드 관악 합주단(Netherlands Wind Ensemble)이 1970년대 초반에 녹음한 것을 가격과 성능 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음반으로 꼽고 싶다. 1993년에 2 for 1인 듀오(Duo) 시리즈로 재발매했는데, 위에 쓴 슈트라우스의 목관 합주 작품 네 곡에 하인츠 홀리거가 바르트 지휘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오보에 협주곡까지 담고 있다. (국내 라이센스로도 발매되었는데, 지금은 폐반된 것 같다.)
ⓟ 1993 Philips Classics Productions
슈트라우스는 이 곡들을 쓰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쟁을 원치 않았다며 부상당해 신음하는 독일 병사들을 수용하는 것도 거부했을 정도로 '무심했던' 모습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혹은 육체와 정신 모두 사그라드는 것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쓴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음악적인 즐거움' 을 누리기 위해서? 음악은 밝고 유쾌하지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