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자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상당히 높은 나라인데, 때로는 그것이 억지로까지 비추어질 때도 있다. 가령 왈츠가 프랑스에서 파생됐다던가 하는 주장들인데, 학계에서는 낭설로밖에 취급되지 않지만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그 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들 한다.
물론 프랑스가 '기원' 은 아니더라도, 왈츠와 오페레타의 대유행에 일조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알자스 태생의 (독일계 프랑스인인) 발트토이펠(Émile Waldteufel, 1837-1915)이 그 대명사로 손꼽히고, 오펜바흐는 거꾸로 빈 오페레타계에 자극을 줄 정도로 생전에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그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에 유행했던 오페레타 아리아와 왈츠, 샹송 등을 한데 모아놓은 앨범이 '물랭 루즈-파리의 왈츠와 로망스(Moulin Rouge-Valses et Romances de Paris)' 다. 원판은 1955년과 1958년에 출반되었고, 1993년에 EMI 프랑스에서 2 for 1의 염가 CD로 재발매한 음반이다.
ⓟ 1993 EMI France
EMI 클래식스의 딱지를 달고는 있지만 그 정체성이 매우 애매한 음반인데, 두 번째 CD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CD 1의 1958년반은 소프라노 자닌느 미쇼(Janine Micheau)가 부른 곡들을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CD 2의 1955년반은 샹퇴즈(chanteuse. 여성 샹송 가수) 마테 알테리(Mathé Altéry)가 부른 곡들 위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 마테 알테리(왼쪽)와 자닌느 미쇼)
게다가 미쇼의 음반에도 샹송 범주로 들어가는 '사랑의 물랭(Moulin d'amour)' 이나 '정원의 두 아이들(Deux enfants dans un jardin)' 같은 곡들이 포함되어 있고, CD 2의 여백을 채우고 있는 3~4분짜리 작은 왈츠들 가운데는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콤비의 뮤지컬 '오클라호마(Oklahoma)' 의 회전목마 왈츠(Carousel Waltz)가 '오페레타 왈츠' 로 실려있기까지 하다.
대개 샹송 곡은 크레아숑(création. 초연이라는 의미)한 가수가 아니면 부르지 않는 것이 관례라지만, 그 때도 예외는 있었던 것 같다. 그거야 이해가 간다고는 해도, '오클라호마' 의 경우에는 완전히 개그였다.
첫 번째 CD의 수록곡들은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오스카 슈트라우스(Oscar Straus, 1870-1954)를 제외하면 모두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인데, 위에 쓴 샹송부터 앙드레 메사제(André Messager, 1853-1929)나 프랑시스 풀랑(Francis Poulenc, 1899-1963)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물론 대부분은 오페레타나 샹송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들의 노래가 차지하고 있는데, 샤를 퀴비예르(Charles Cuvillier, 1877-1955)나 레이날도 안(Reynaldo Hahn, 1874-1947), 샤를 르코크(Charles Lecocq, 1832-1918) 등의 오페레타 아리아는 프랑스 밖에서 듣기 힘든 만큼 꽤 귀중한 녹음이다.
미쇼의 노래 뒤에 여백으로 실린 작품들은 발트토이펠의 왈츠 네 곡인데, 서주가 뭉텅 잘려있고 무겁고 탁한 녹음 때문에 춤곡으로서의 날렵함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난점이다. (물론 연주 자체도 꽤 구식이다.) 특히 군대 행진곡 식으로 연주된 '너를 사랑해(Je t'aime)' 는 크나퍼츠부슈 스타일의 빈 왈츠 연주를 떠올리게 하는 엄청난(???) 연주다.
합창과 관현악은 '카리용(Le Carillon)' 이라는 자작의 노래도 앨범에 넣은 폴 보노(Paul Bonneau, 1918-1995)가 지휘하는 레이몽 생폴 합창단(Chœurs Raymond Saint-Paul)과 교향악단(Orchestre Symphonique)이 맡았는데, '교향악단' 의 경우에는 지난 번 소개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에도 등장했던 악단이다. 녹음용 악단인지, 아니면 상설 악단인지 정말 궁금하다.
두 번째 CD는 반반으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알테리가 자크 메테앙(Jacques Météhen)이 지휘하는 관현악단의 반주로 부른 샹송 앨범이고 나머지는 위의 보노가 파리 대관현악단(Grand Orchestre de Paris)을 지휘해 녹음한 왈츠 소곡집이다.
알테리는 샹송 가수들 중에서는 꽤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 원래는 성악가였던 양친의 영향으로 클래식 성악을 전공했던 인물이었다. 1951년에 파테 레코드에 입사해 비서로 일하다가 갑자기 샹송 가수로 발탁되어 전업했는데, 그 때문인지 클래식 레퍼토리도 꽤 자주 불렀다고 한다. (미쇼의 앨범과 겹치는 곡도 두 곡 담겨 있다.)
메테앙은 에디트 피아프나 티노 로시, 장 사블롱, 샤를 트레네 등 다른 샹송 가수들의 앨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앨범에서는 아주 유쾌한 편곡 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두 번째 트랙의 '프루프루(Frou-frou)' 다음에 이어지는 '매혹(Fascination)' 의 인트로에 '프루프루' 첫머리를 사용하는 식으로 쭉 이어나가면서 앨범 전체에 유기적인 효과를 낳게하는 것 말이다.
왈츠 소곡들은 SP 시대의 전형적인 '3분 예술' 식 편곡인데, 물론 편곡 솜씨 자체는 별로 나무랄 데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잘라먹기식' 편곡을 싫어해서 유감일 따름이다. CD의 컨셉에서도 마구 벗어나는 곡들이 널려 있는데, 진짜 프랑스 혹은 프랑스계 작곡가의 작품은 겨우 두 곡 뿐이다.
결론짓자면, 컨셉의 난잡함이나 소소한 음질 불만(둘 다 모노 녹음임) 등이 난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지만, 벨 에포크 시절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앨범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시중에서 구하기에는 무척 애로사항이 꽃필 듯한 앨범이라 아쉽다. (중고음반점 등에서 간간히 보이기는 하므로 체크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