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가 작곡에서 주로 전력투구한 장르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이었고, 정작 연주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파이프 오르간 독주곡은 상당히 적다. 그 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 등을 위한 독주곡이나 실내악도 습작기의 것을 제외하면 작품 목록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다만 위대한 예외가 있다. 바로 현악 5중주.
교향곡 한 곡을 완성하면 곧바로 다음 교향곡의 창작으로 넘어가던 브루크너의 작곡 습관에 비추어 볼 때, 1876-79년에 보여준 그의 행보는 상당히 특이했다. 그 때까지 브루크너는 (생전에 발표하지 못한 00번과 0번 두 곡 외에) 1~5번의 다섯 개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그 뒤로 약 3년에 가까운 공백 기간이 두어졌던 것이다.
이 기간에 브루크너는 자신이 썼던 2~5번 네 곡의 교향곡을 개정했고, 개정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던 1878년 12월 쯤부터 이 현악 5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작품의 작곡 동기는 18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데, 브루크너가 교수직을 얻기 위해 최종적으로 치루었던 빈 음악원의 시험에 감독관으로 입회했던 요제프 헬메스베르거(Josef Hellmesberger)가 시험 직후 브루크너에게 자신의 4중주단을 위한 작품을 부탁했던 것이다.
현악 5중주곡은 1879년 7월에 작곡이 완료되었지만, 위촉자였던 헬메스베르거는 이 작품을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에 필적할 대작' 이라고 평했으면서도 정작 초연에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곡이 기교와 내면적인 표현 모두 상당히 어려운 난곡이라는 점도 있었고, 당시 빈에서 굳어져 있던 브루크너에 대한 이미지-촌스러운 시골뜨기-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브루크너는 헬메스베르거가 특히 어렵다고 한 2악장(스케르초)을 대체할 목적으로 1879년 12월에 단악장의 '간주곡(인테르메초)' 을 별도로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헬메스베르거는 계속 꾸무럭거리며 연주를 피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해 브루크너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의 기획으로 1881년 11월 17일에 4악장을 제외한 버전이 초연됐고, 헬메스베르거가 자신의 4중주단을 이끌고 전곡을 초연한 것은 1885년 1월 8일의 일이었다.
브루크너의 첫 '대중적 성공작' 이 된 이 곡은 물론 현악 5중주-바이올린 2/비올라 2/첼로-라는 실내악 편성의 이점을 최대한도로 끌어낸 작품이기도 하지만, 브루크너가 자신의 교향곡들에서 수없이 보여주었던 고도의 대위법 기술과 끈질긴 시퀀스, 유니즌, 게네랄파우제(총휴지) 등도 녹아들어가 있어서 때로는 실내악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점에 착안했는지, 이 현악 5중주에 손을 대어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한 이들도 꽤 있었다. 루돌프 바움가르트너, 제임스 드류, 프리츠 외저, 스타니스와프 스크로바체프스키, 한스 슈타들마이어, 그리고 가네코 겐지가 현재 확인되어 있는 편곡자들인데, 이들 중 여기서 거론하려는 것이 슈타들마이어(Hans Stadlmair)의 편곡판이다.
슈타들마이어는 이 5중주곡을 자신이 창단한 뮌헨 실내 관현악단을 위해 편곡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편곡판 중 유일하게 전곡을 모두 편곡한 것이다. (나머지는 3악장 아다지오만을 편곡한 것임) 그리고 이 편곡판을 대규모 현악 합주용으로 다시 다듬어 녹음한 것이 로타 차그로섹(Lothar Zagrosek) 지휘의 밤베르크 교향악단(Bamberger Symphoniker)이 연주한 오르페오(Orfeo)의 CD다.
ⓟ 1995 Orfeo International Music GmbH
차그로섹은 오르페오에 슈미트, 아이넴, 마르탱 등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등 좀처럼 연주가 뜸한 곡들을 주로 녹음한 바 있었는데, 이 CD도 브루크너 5중주곡의 현악 합주판 최초 전곡 녹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채로운 물건이다.
1악장 첫머리를 듣고는 같은 조성으로 작곡된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 을 떠올렸는데, 결코 최상급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밤베르크 교향악단의 스트링이지만 5중주보다 더 풍윤해진 합주의 음색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교향곡에서 보여준 특징들은 대규모 편성이 되면서 더 확실하게 표현되고 있고, 3악장 아다지오는 정말 일품이다. (시쳇말로 '완소' 정도?)
다만 대규모 편성이 반작용을 일으킨 부분도 종종 발견되는데, 빠른 템포의 2악장 스케르초는 헬메스베르거가 지적한 대로 5중주 편성으로도 매우 어려운 곡이다. 그것을 대규모 합주로 연주했으니, 스트링 주자들이 상당히 고역스러워했을 것이다. 물론 결과물 자체는 크게 흠잡을 것은 없지만, 결국 5중주판에서 요구되는 생기발랄함은 어느 정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브루크너와 함께 커플링된 곡은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 현악 합주판(작곡자 자신의 2차 편곡판. 1943)인데, 나 자신이 아직 쇤베르크의 곡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어서인지 상당히 지루했다. 물론 메인인 브루크너의 경우에는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건 이 음반 뿐' 이라는 결정적인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이 CD가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p.s.: 슈타들마이어의 현악 합주판 전곡 녹음은 이 CD 외에 청소년 악단인 '독일 현악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가 2001년에 내놓은 앨범도 있지만, 독일 로컬로만 유통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