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듣보잡' 작곡가들의 작품 녹음과 박리다매 두 가지 전략만으로 메이저 음반사들을 (적어도 양적으로) 관광시키는 지경으로까지 성장한 것이 홍콩 소재 다국적 음반사인 낙소스(Naxos)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 부터는 이미 저작권 기한이 만료된 메이저 음반사들의 소위 '히스토리컬 레코딩' 의 CD 복각판을 출반하면서 그 영역에서도 무시 못할 축을 형성하고 있고.
유료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유명 클래식 음반사로서는 가장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는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 때문에라도 결코 깎아내릴 수 없는데, 그 뮤직라이브러리에서도 듣지 못하는 낙소스 음반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저작권 문제가 해결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인 것 같은데, 예전에 레어 애청곡선에서 소개한 빅토르 데 사바타의 교향시가 포함된 앨범이 그랬고 이번에 소개할 카를로 알베르토 피치니(Carlo Alberto Pizzini, 1905-1981)라는 작곡가의 자작자연 앨범도 마찬가지다(음반 번호는 8.111317).
ⓟ 2008 Naxos Rights International Ltd.
피치니는 위키 영어판은 물론이고 모국어판인 이탈리아어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인물인데, '듣보잡' 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마리오 필라티-레어 애청곡선 85편 참조-도 빈약하나마 독립 항목으로 올라와 있는 상황이라 꽤나 '캐안습' 이고. 아무튼 위키는 물론이고 야후 등 포털에서까지 작곡가에 대한 아무 배경 지식도 얻을 수 없었고, 그리고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시험삼아 듣지도 못하고 광복절에 서울 시내 모 유명 음반가게에서 사왔다.
(아마 작곡가의 아들로 추정되는) 클라우디오 피치니가 직접 속지 해설을 집필했는데, 흔히 '듣보잡' 을 소개할 때 동원되는 온갖 주변 유명인들의 이름과 해외 공연 장소 등이 꽤 장황하게 경력 란에서 소개되고 있다. 심지어 이탈리아 공로 대십자 기사장이나 프랑스 레종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 서독 공로 십자장 수상 같은 것까지 열거되고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도 저 작곡가가 적어도 이탈리아 밖에서는 여전히 '듣보잡' 이라는 것을 상쇄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단 거품을 걷어내고 중요한 이력만 보면,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제자였고 이탈리아 저작권 협회(SIAE)의 임원이나 이탈리아 방송 협회(RAI)의 음악 부서 집행 위원 등을 역임했고 유럽 각지의 음악 콩쿨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작곡 활동에 대해서는 그냥 다양한 영역의 곡을 썼다고만 돼 있고, 장 마르티농이나 칼 슈리히트 같은 지휘자와 베를린 필 같은 악단이 그것들을 연주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저 두 지휘자와 베를린 필의 레귤러 레퍼토리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작곡가로서 가진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생각되고 있고. (오히려 2차대전 후 영향력이 있던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피치니보다 훨씬 전위적이었던 달라피콜라나 마데르나, 베리오 등이었다.)
그리고 수록된 작품들의 제목이나 부제로 봤을 때는 '정치적 태도가 애매했던' 스승 레스피기보다 더 '정권 영합형'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모더니즘 예술 사조 중 신고전주의 계통이었던 노베첸토 이탈리아노(Novecento Italiano)의 한 계파인 스트라파에세(Strapaese)를 제목으로 떡하니 내건 작품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스트라파에세는 1930년대에 이탈리아를 휩쓴 농촌 선전용 파시즘 개념이라고 하는데, 가톨릭을 믿는 신심 강한 농부들의 비위를 가능한한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들의 민족주의 성향과 낭만주의를 적절히 결합해 정치 선전에 이용했다고 한다.
나치에서 농민과 노동자를 회유할 때 지껄였던 '노동의 미' 와 비슷한 개념인데, 피치니가 스트라파에세의 정치적 방향성을 확실히 인식하고 제목을 붙인 것인지, 아니면 농민들의 인상을 묘사하기 위한 우회적 표현으로 제목을 단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해설에는 레스피기가 "이 곡을 스트라파에세라고 부르자구!" 라고 했다는데, 제안자인 레스피기의 진의야 어쨌든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제목을 붙인 이가 피치니였으니 그 의혹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약간이기는 하지만, 스트라파에세와 대척점에 있던 미래주의(Futurism)에도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피에몬테에(Al Piemonte)' 라는 교향 3부작의 마지막 악장인 '자동차와 마음(Macchine e cuori)' 이 그 증거인데, 부제가 이탈리아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 중 하나인 피아트(Fiat)로 되어 있다.
곡의 메인 타이틀로 되어 있는 피에몬테주의 주도가 토리노인데, 피아트는 토리노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자동차 회사다(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FIAT). 저 곡이 피아트의 위촉으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악장 초반에 나오는 콘트라베이스와 트롬본의 기계적이고 불협화음적인 진행에서 미래주의 악풍의 영향력이 느껴지고 있다.
작곡가 외에 지휘자로도 활동한 만큼 녹음도 몇 종류 남아있는 것 같은데, 올해 4월에 낙소스 히스토리컬에서 내놓은 이 CD는 특이하게 이탈리아 관현악단이 아닌 독일의 뮌헨 필(Münchner Philharmoniker)을 지휘한 녹음이다. 다만 라이브나 상업용 음반 녹음은 아니고 바이에른 방송국(Bayerischen Rundfunk)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것 같은데, 수록곡은 다음과 같다;
1. 교향 3부작 '피에몬테에(Al Piemonte)'*
2. 고전 형식의 스케르초 (Scherzo in stile classico)
3. 교향시 '돌로미테의 시(Il poema delle Dolomiti)'
4. 현을 위한 사라방드 '코렐리에게 바침(Omaggio a Corelli)'*
5. 주제와 변주 형식의 디베르티멘토 '포스토이나의 동굴(Grotte di Postumia)'*
6. 스트라파에세-성모승천축일의 인상(Strapaese-Impressioni dal vero)
*표시한 곡들은 1956년 9월 22일 녹음이고, 나머지는 1955년 6월 16일 녹음. 녹음 장소는 모두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국 스튜디오임.
아무래도 녹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모노고, 다이내믹 레인지도 좁은 편이다. 다만 테이프 녹음이라 음질 자체는 비교적 깨끗한 편인데, 색채적인 표현을 요하는 1, 3, 5번 곡에서는 아무래도 부족한 면이 많다. 곡들은 대체로 레스피기 작품 스타일인 신고전주의풍 형식에 인상주의와 후기 낭만주의의 악상을 버무린 절충형 보수성을 띄고 있어서, 듣기에 그렇게 어렵지는 않고.
다만 속지의 '닥치고 칭송형' 해설과 '듣보잡 현시창' 이라는 작곡가의 명성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나 스트라파에세 등 '정치적으로 석연찮은' 대목은 여전히 개운치가 않은데, 음반에나 적합한 요식행위성 문장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자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추가사항: 무슨 사정으로 늦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 작성 뒤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도 업데이트되었다. 음반 번호도 동일한데, 다만 음질은 위에 쓴 대로 그렇게 좋지는 않으므로 유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