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현악 앨범보다는 가짓수가 적지만, 그 중에서도 나름대로 나의 음반 목록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성악곡 앨범들이다. 개중에는 해당 성악가의 '민족성' 을 살린 컨셉의 앨범이나, 아니면 꽤 희귀한 민요 혹은 그에 준하는 앨범을 담은 것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컨셉에 끌려서 산 것이 네타냐 다브라스가 부른 캉틀루브 편곡의 '오베르뉴의 노래' (뱅가드),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하지다키스, 테오도라키스, 크사르하코스, 치차니스 등이 작곡한 그리스 노래들을 모은 '조국이 가르쳐준 노래' (DG), 그리고 여기 소개할 카탈루냐 민요집(소니 클래시컬)이다.
ⓟ 1991 Sony Classical GmbH
작년에 막 60줄을 넘긴 카레라스(José Carreras)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고, 그 곳의 음악원에서 성악을 배워 고향의 유명한 오페라극장인 리세우 대극장에서 데뷰했다. 바르셀로나는 에스파냐에서 바스크와 함께 독립성이 아주 강한 고장인 카탈루냐의 주도이고, 이 앨범도 그러한 '민족 정체성' 컨셉에서 나온 것이다.
카탈루냐인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뿌리깊은 반항심은 몇백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자랑하는데, 카스티야 주도의 에스파냐 통일 운동에 대응해 자신들의 언어인 카탈루냐어를 고집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치권 혹은 독립을 내걸고 끈질기게 맞섰다.
이러한 독립 투쟁은 20세기까지 이어졌는데, 1930년대에 에스파냐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내전에서 최후의 항전이 벌어진 곳도 바르셀로나였다. 인민전선의 본거지였던 탓에 오랜 지역 감정에 이데올로기의 증오까지 겹쳐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결국 프랑코의 팔랑헤당이 무력으로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켜 내전을 종결지었다.
그 때문에 카탈루냐는 프랑코의 독재 정권하에서 '시범 케이스' 가 되는 일이 많았고, 자치권이나 독립 요구는 고사하고 그들만의 언어인 카탈루냐어의 사용까지 금지된 채 고난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다. 물론 프랑코가 죽은 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언어에 대한 제재도 풀렸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확보한 상태다.
카레라스가 태어나고 자라던 시기는 이러한 카탈루냐 수난 시대와 맥을 같이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카탈루냐어로 된 민요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을 공적인 무대에서 부를 수는 없었다. 그가 민요를 자신의 레퍼토리로 부른다고 하면, 대부분 '공식적인' 에스파냐어인 카스티야어로 된 다른 고장의 노래들이었다.
이후 카레라스는 세계의 오페라극장을 석권하는 1급 테너 가수가 되었고, 백혈병을 극복해내고 1990년에 그 유명한 '쓰리 테너' 의 일원이 되어 화려한 경력을 쌓는 등 팝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동시에 그의 '정체성' 을 재확인하는 작업도 이루어졌고, 이 앨범이 특히 화제가 되었다.
그런 컨셉에 끌려서 산 것이 네타냐 다브라스가 부른 캉틀루브 편곡의 '오베르뉴의 노래' (뱅가드),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하지다키스, 테오도라키스, 크사르하코스, 치차니스 등이 작곡한 그리스 노래들을 모은 '조국이 가르쳐준 노래' (DG), 그리고 여기 소개할 카탈루냐 민요집(소니 클래시컬)이다.

작년에 막 60줄을 넘긴 카레라스(José Carreras)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고, 그 곳의 음악원에서 성악을 배워 고향의 유명한 오페라극장인 리세우 대극장에서 데뷰했다. 바르셀로나는 에스파냐에서 바스크와 함께 독립성이 아주 강한 고장인 카탈루냐의 주도이고, 이 앨범도 그러한 '민족 정체성' 컨셉에서 나온 것이다.
카탈루냐인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뿌리깊은 반항심은 몇백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자랑하는데, 카스티야 주도의 에스파냐 통일 운동에 대응해 자신들의 언어인 카탈루냐어를 고집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치권 혹은 독립을 내걸고 끈질기게 맞섰다.
이러한 독립 투쟁은 20세기까지 이어졌는데, 1930년대에 에스파냐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내전에서 최후의 항전이 벌어진 곳도 바르셀로나였다. 인민전선의 본거지였던 탓에 오랜 지역 감정에 이데올로기의 증오까지 겹쳐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결국 프랑코의 팔랑헤당이 무력으로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켜 내전을 종결지었다.
그 때문에 카탈루냐는 프랑코의 독재 정권하에서 '시범 케이스' 가 되는 일이 많았고, 자치권이나 독립 요구는 고사하고 그들만의 언어인 카탈루냐어의 사용까지 금지된 채 고난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다. 물론 프랑코가 죽은 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언어에 대한 제재도 풀렸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확보한 상태다.
카레라스가 태어나고 자라던 시기는 이러한 카탈루냐 수난 시대와 맥을 같이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카탈루냐어로 된 민요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을 공적인 무대에서 부를 수는 없었다. 그가 민요를 자신의 레퍼토리로 부른다고 하면, 대부분 '공식적인' 에스파냐어인 카스티야어로 된 다른 고장의 노래들이었다.
이후 카레라스는 세계의 오페라극장을 석권하는 1급 테너 가수가 되었고, 백혈병을 극복해내고 1990년에 그 유명한 '쓰리 테너' 의 일원이 되어 화려한 경력을 쌓는 등 팝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동시에 그의 '정체성' 을 재확인하는 작업도 이루어졌고, 이 앨범이 특히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