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1기가 기본인 현대 클래식씬이지만, 때로는 다재다능형 인물들이 염장을 질러대는 바닥이기도 하다. 물론 바로크 시대의 그것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피아노, 첼로, 작곡, 지휘 어느 것에도 익숙치 않은 내게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성악가가 지휘를 하는 경우는, 대개 합창단이나 중창단을 비롯한 같은 전공 관계의 음악 단체에 한정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합창 전문 지휘자들의 경우, 성악가 혹은 성악 전공자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20세기 초반의 지크프리트 오크스나 브루노 키텔의 경우에는 작곡이나 기악 분야에서 공부하다가 합창 지휘자가 되기도 했지만.)
하지만 몇몇 성악가들이 관현악 지휘에까지 손을 댄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비록 합창 딸린 관현악 작품에 한하지만, 테너 페터 슈라이어가 바흐와 모차르트 등의 종교음악을 지휘해 녹음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성악가로서는 은퇴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도 말러의 '대지의 노래' 를 비롯한 성악 관계 작품을 종종 지휘하고 있다.
심지어 테너 호세 쿠라는 노래와 지휘를 동시에 하는 진기명기풍 무대도 선보였으며, 자신만의 레코드사를 차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이라는 본격 관현악 레퍼토리를 녹음해 호평을 받기까지 했다. 이러한 쿠라의 지휘 행각을 이야기할 때 종종 비교된 인물이 바로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였다.
이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린 '쓰리 테너' 중 한 사람이었던 도밍고는 최근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접는다는 소식으로 애호가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인지 1980년대부터 지휘자로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요즘에는 EMI에 꽤 여러 종류의 음반을 내놓기까지 하고 있다.
도밍고가 지휘자로서 EMI에 취입한 음반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지휘 외에도 주인공인 아이젠슈타인 역을 겸함)' 같은 성악 관계의 것들도 있지만, 장영주와 함께 한 바이올린 소품집 'Fire & Ice' 라던가, 기타리스트 마누엘 바루에코와 협연한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스 협주곡' 같은 순수 기악곡 앨범까지 아우르고 있다.
이러한 도밍고의 지휘 행각(?) 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이 1993년 발매된 앨범이었다. '도밍고가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Domingo conducts Tchaikovsky)' 라는 타이틀이었는데, EMI가 차이코프스키 서거 100주년 기념 기획의 일환으로 대담하게 출시한 앨범이었다.
ⓟ 1997 EMI Records Ltd.
그 이전까지만 해도 도밍고가 지휘를 맡은 앨범은 몇 장 안되었고, 그나마 오페라 관련 녹음이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앨범은 도밍고가 지휘자로서 내놓은 최초의 관현악곡 위주 음반이 되었고, 수많은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게 만들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를 지휘한 이 앨범은, 물론 성악가로서의 도밍고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곡 '다만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Net, tolko tot, kto znal)' 와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 중 렌스키의 마지막 아리아 두 곡을 끼워 넣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특별히 더그 라일리(Doug Riley)가 첼로 독주를 곁들여 편곡했는데, 독주 부분은 오프라 하노이(Ofra Harnoy)가 연주했다.
비록 몇몇 대목에서 서투른 러시아어 딕션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상당히 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도밍고인 만큼 노래 솜씨는 여전히 노련하다. 특히 가곡에서의 노래가 상당히 인상적인데, 편곡 탓인지는 몰라도 가곡 보다는 아리아같은 느낌이다.
위의 두 노래를 랜달 베어(Randall Behr)가 지휘한 것을 빼면, 나머지 세 곡은 모두 도밍고의 지휘로 녹음되었다.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Fantasy Overture 'Romeo and Juliet')', 이탈리아 기상곡(Capriccio italien), 그리고 1812년 서곡(Ouverture solennelle '1812')이 그것들이다.
사실 도밍고가 이 앨범에서 지휘자로서 보여준 특별한 개성은 그다지 없었다. 대개는 과거 혹은 동시대의 지휘자들이 보여준 평균적인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으며, 지휘 스승이었던 이고르 마르케비치의 영향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첫 관현악 레퍼토리의 녹음이라는 점 때문에 도밍고가 소극적인 해석을 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녹음의 프로듀서였던 사이먼 우즈(Simon Woods)가 밝히듯이, 도밍고는 이들 작품에서 성악가가 본업인 인물답게 멜로디에 신선한 감각을 불어넣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도밍고가 이탈리아 기상곡에서 보여주는 해석에 가장 공감이 간다. 떠들썩한 중간부 뿐 아니라, 멜랑콜리로 가득한 이탈리아 민요 인용구인 첫머리(1:33~2:38)에서도 꽤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성악가 스타일의 접근 방식이 취해졌는데, 오페라 무대의 프로답게 극적인 면의 설계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부 후반에서 베이스 드럼의 롤과 함께 상당히 격앙된 감정으로 흐르는 '사랑의 테마(16:00~16:24)' 에서는 너무 감정에 몰입했는지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이 상쇄되고 너무 거칠어지는 폐단도 보인다. 코다에서 취한 느린 템포도 장엄하기는 하지만 좀 허장성세스러운 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도밍고는 위의 두 레퍼토리 뿐 아니라 관현악곡 전체에서 비교적 느린 템포를 잡고 있는데, 크나퍼츠부슈나 클렘페러, 첼리비다케를 벤치마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그 느린 템포가 상당히 두드러진 것이 바로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한 1812년 서곡이었다.
원제목이 '장엄 서곡' 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었는지, 도밍고는 앞의 두 곡보다 더 템포를 떨어뜨려 17분이나 되는 엄청나게 느린 연주로 만들었다. 카라얀이나 스베틀라노프의 것보다도 2분 가량이나 더 느릴 정도다. 다만, 러시아 정교의 성가를 인용한 첫머리는 일반적인 템포를 취하고 있다.
성가가 끝난 뒤부터 시작되는 주부(2:03~4:08)는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데, 극적인 면을 기대하고 듣는 이에게는 엄청난 실망을 가져다줄 소지가 많은 대목이다. 그나마 텐션은 살아 있어서 최소한의 늘어짐을 막아주는데, 러시아 음악 하면 떠오르는 금관의 돌출은 많이 절제되어 있다. (대신에 타악기, 특히 베이스 드럼이 많이 강조되어 있다.)
이어서 차례로 진행되는 러시아군의 등장(4:08~5:12)과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5:12~7:19)' 의 대목도 앞부분 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평균적인 연주보다는 느리다. 물론 이러한 느린 템포가 빛을 발하는 부분도 있는데, 한바탕 격돌이 이어진 뒤 나오는 노브고로트 지방 민요에 의한 주제(7:19~9:58)가 그것이다. 일반 지휘자들보다 루바토를 더 많이 사용해 꽤 끈적한 느낌인데, 그 만큼 도밍고가 '노래' 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예의 '대포' 와 '라 마르세예즈' 첫머리가 나오면서 프랑스군의 패퇴를 묘사한 부분(13:31~14:35)도 마찬가지로 느리다. 카라얀이 이 부분을 일부러 빨리 연주해 베를린 필의 스트링이 고성능이라는 것을 과시하면서 패배의 이미지를 강화한데 비해, 도밍고는 황소걸음으로 무겁게 후퇴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머리 성가의 장엄한 합주(14:35~16:29)에서 느린 템포는 다시 플러스 요인이 되는데, '장엄 서곡' 이라는 타이틀을 최대한 강조한 연출로 보인다.
이 부분의 대포 소리와 종소리, 브라스 밴드 추가 같은 연출은 예로부터 '전시 효과' 의 극치로 여겨져 왔는데, 로버트 쇼는 애틀랜타 교향악단의 송년 음악회에서 이 효과를 선보이다가 콘서트홀의 화재경보기와 스프링쿨러가 작동되는 바람에 오히려 엄청난 역효과를 당하기까지 했다.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노련한 예포대를 섭외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홀 바깥의 공터에 1개 포대급의 실제 대포들을 방열해 놓고 공포탄을 쏘도록 했고, 이 장면은 영상물로도 볼 수 있다.
레코드로서 이 서곡이 요구하는 특수 효과를 최초로 선보인 것이 안탈 도라티의 음반(머큐리)이었다. 최근의 에리히 쿤첼 음반(텔락) 같은 경우에는 스피커 고장을 경고하는 문구까지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는 예에서도 보듯, 일명 '오디오 파일 음반' 용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이 이 서곡인 것이다.
프로듀서 사이먼 우즈도 위의 음반들이나 연주 만큼은 아니지만, 이들 특수 효과를 실제 소리로 연출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대포는 투팅 벡 공용지에서 영국 왕립 포병대의 도움으로 포성을 녹음해 음반에 실었고, 종소리의 경우에는 화이트채플 종 공장에서 진짜 교회 종을 빌려다가 스튜디오의 오케스트라 뒤편에 설치했다.
브라스 밴드의 경우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5번 4악장 코다에서 프란츠 샬크가 취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관현악의 금관 파트를 그대로 두 배로 불렸고-그러니까 호른 8, 트럼펫 8, 트롬본 6, 튜바 2로 늘어난다-, 거기에 파이프 오르간과 콘트라베이스 주자 10명을 추가로 배치해 저음부를 강화시켰다.
다만 대포 소리의 경우에는 저음부에 집중되는 바람에 오히려 둔탁한 느낌인데, 아마 SACD 같은 포맷이었다면 좀 더 예각적이고 충격적인 소리로 포착되었을 것 같아 아쉽다. (내가 포병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그리고 이 앨범의 녹음이 일반 콘서트홀이 아닌, 올 세인츠 교회에서 이루어져서 그런지 잔향이 좀 많이 잡혀서 때로는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지휘자로서의 도밍고는 이 앨범에서 '모험' 보다는 '안정' 을 택했고, 그 대신 성악가로서의 감수성을 관현악곡에 적용시키고자 했다고 나름대로의 추측성 결론을 지어 보았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겠지만, 나는 이 녹음을 상당히 재미있고 인상적으로 들었다.
적어도 도밍고는 이 앨범에서 '치기어린' 생각으로 지휘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름대로 프로의 도전 정신으로 만든 음반이라는 느낌이 드는 괜찮은 물건이다. 때로는 이 글의 타이틀인 '명연' 에는 걸맞지는 않아도 남에게 추천해서 나쁠 것 없는 음반이라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5000~6000원 대의 '레드 라인(Red Line)' 시리즈로 재발매되어 있으니, 금전 손실도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이 앨범 이후 도밍고가 지휘자로서 녹음한 앨범을 듣지 않아서, 도밍고의 지휘 활동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오고 있는 지는 잘 모르는 실정이다. 디스코그래피를 대충 보니까 '라 트라비아타' 의 전곡 DVD도 있고 하니 그래도 활동을 계속 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관현악곡에 대한 도전 의사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성악가 활동을 완전히 접은 뒤의 행보를 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