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음악은 그 동안 '철저한 쇄국주의의 찬가', '김부자 왕조의 어용 음악' 등의 부정적인 수식어를 면치 못해왔고, 지금도 그 강도는 덜해졌을지 몰라도 여전하다. 여느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문화예술은 항상 그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가는 형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북한의 여러 예술단체 중 기악을 전문으로, 특히 서양식 대규모 관현악단의 형태로 되어 있는 단체가 바로 국립교향악단이다. 대외적으로는 '조선 국립 교향악단' 이라고 하고, 북한 내에서는 그냥 '국립교향악단' 또는 '평양 국립 교향악단' 이라고 하는 단체로, 북한 예술단체 중 맨 먼저 창단(1946.8.8)되었다.
이 관현악단은 1990년대 초반 범민족통일음악회 등을 통해 남한에 그 존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0년에 북한 예술단체로서는 최초로 서울을 방문해 공연하면서 커다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85년에도 소위 '평양예술단' 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공연단이 방문한 적은 있지만, 만수대예술단이나 피바다가극단 등에서 가려 뽑은 예술인들로 구성된 임시 공연단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독자적인 대규모 관현악단이었던 것은 아니고, 1980년대까지는 계속 국립예술극장, 조선예술영화촬영소, 피바다가극단의 전속 관현악단으로 되어 있었다. 순수 기악보다는 종합적인 무대 공연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북한 문화예술 정책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연합 형태로 초연된 작품들 중에는 한반도 최초의 본격 오페라인 김순남의 '인민유격대' 도 있었다.
국립교향악단은 이러한 무대작품이나 영화음악의 연주/녹음 외에도 독자적인 공연을 병행했지만, 북한 측 기록에 따르면 1960년대에 이르자 이러한 공연이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해 큰 위기에 직면했다고 되어 있다. 이유는 '인민성을 반영하지 않은 외국 작품의 무분별한 공연' 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 것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김정일은 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에서 문화예술부문을 지도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예술론', '영화예술론', '건축예술론' 등의 이론 저서를 출간하면서 북한 문화정책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 때 김정일은 국립교향악단의 공연 실적 부진을 거론하면서 '인민들에게 친숙한 민요나 가요곡을 가지고 공연을 해보라' 는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1970년에 나온 작품들이 김린욱의 '내 고향의 정든 집(원곡은 이면상의 가요)', 김윤붕의 '그네뛰는 처녀(원곡은 김준도의 민요풍 가요)', 그리고 김영규의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원곡은 김옥성의 관현악과 합창)' 세 곡이었다.
이 세 곡은 지금도 국립교향악단의 주요 연주곡목이며, '조선식 교향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걸작' 으로 공인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이후 지금까지 이러한 '노래 기반의 편곡식 창작' 은 변하지 않는 지도 방침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국립교향악단은 1980년대까지 '주체 교향악의 우수성' 을 알리는 첨병 역할을 했고, 외국에 소개될 때도 자국의 관현악 작품 연주에 관한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때도 서양 레퍼토리를 연주하기는 했지만, 그 비율은 30%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1980년대 말엽부터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급속도로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자, 북한에서도 체제 수호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문화예술 부문에서도 거의 국수주의에 가까운 흐름이 주류가 되었고, 국립교향악단에서 창작된 작품들도 교향곡 '경례를 받으시라' 와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같은 작품에서 보여지듯 '철저히 북한 내의 수요에 맞춘'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성' 을 강조한 노선은 2000년도 들어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6.15 공동 선언과 국립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을 계기로 남북 간의 문화예술 교류가 급진전 되었고, 2002년에는 KBS 교향악단이 평양에 초청되어 단독 공연과 국립교향악단과의 합동 공연을 개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국립교향악단의 레퍼토리 배분과 공연의 성격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국내 잡지인 '민족21' 의 2005년 4월호에 실려 있는 국립교향악단 관련 특집 기사는 그 변화의 실체를 약간이나마 소개하고 있다. 변화의 주체와 흐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간의 북한 문화예술사를 보건대 단 한 사람의 의향에 맞추었을 것이다. 바로 김정일이다.
국립교향악단은 2004년 12월 4일에 교향조곡 '선군장정의 길' 을 김정일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했는데, 이 곡은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에서 발표한 같은 제목의 합창조곡을 관현악용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선군장정의 길' 은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의 모든 언론 매체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는 혁명가극 '피바다' 가 유명해진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김정일은 이 공연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고 하는데, 이를 전후해 국립교향악단에 대한 북한의 언론 보도는 그 횟수와 집중력에 있어서 높은 수치로 뛰어올라 있었다. 국립교향악단은 그 해 연말부터 주요 공연장인 중극장 규모의 모란봉극장(약 800석)이 아닌, 그보다 좀 더 규모가 큰 인민문화궁전에서 연속공연을 진행했다. 기악 전문 단체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립교향악단의 공연은 북한 주재 외교관들(2004.12.29)이나 북한을 방문한 예술가들(2005.7.3), 러시아 대통령 특사(2005.10.8) 등도 관람했는데, 이들 사례는 모두 노동신문 등을 통해 기사화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국립교향악단의 연주 곡목에서 서양 레퍼토리가 나름대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가장 자주 연주된 곡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였다.
물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에 관해서는 이전에도 북한에서 '조선예술' 등의 잡지를 통해 언급된 바 있었다. 하지만 이 곡이 (비록 발췌 연주이기는 했어도) 이렇게 자주 연주된 적은 없었다. 북한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례들만 살펴 봐도 이 정도다;
2005년 2월 28일: 1악장 연주 (김정일 관람. 인민문화궁전)
2005년 4월 25일: 1악장 연주 (조선인민군 창건 73주년 음악회. 인민문화궁전)
2005년 7월 3일: 1악장 연주 (러시아 모이세예프 국립 아카데미 민속무용단 관람. 봉화예술극장)
2005년 10월 8일: 1악장 연주 (러시아 원동연방구 대통령 전권대표 관람. 인민문화궁전)
2006년 2월 17일: 1악장 연주 (김정일 관람. 인민문화궁전)
2006년 4월 17일: 1악장 연주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참가자들 관람. 모란봉극장)
2006년 5월 1일: 1악장 연주 (노동절 기념 음악회. 북한 주재 외교관과 유학생들 관람. 모란봉극장)
2006년 7월 16일: 1악장 연주 (러시아 내무성 협주단 관람. 모란봉극장)
2006년 8월 8일: 4악장 연주 (국립교향악단 창단 60주년 기념 음악회. 모란봉극장)
2005~2006년의 2년 동안 보도된 국립교향악단 관련 공연 기사에서 이 곡이 빠진 것은 불과 3~4회 정도였다. 이외에도 보도되지 않은 일반 공연이 더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공연 횟수는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지휘한 김호윤은 공훈예술가 직위를 수여받았고, 호른 주자인 신광호를 비롯한 수석급 단원들에게도 공훈배우 직위가 주어졌다.
2006년 4월 17일부터 공연장이 다시 모란봉극장으로 바뀐 것도 중요한 사실인데, 국립교향악단이 인민문화궁전에서 연속공연을 가지는 동안 김정일의 지시로 새롭게 개축된 것이었다. 김정일이 개축된 모란봉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 공연을 처음 관람한 것은 5월 7일의 일이었는데, 가장 최근인 11월 26일에도 모란봉극장을 찾아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이 기간동안 연주된 다른 서양 레퍼토리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축전 서곡', 주페의 오페레타 '시인과 농부' 서곡,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와 '봄의 소리',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로지나의 아리아(방금 들린 그대 목소리),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 중 왈츠와 '이탈리아 기상곡',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등이었다. (주로 러시아 레퍼토리가 많이 추가되었다.)
사실 국립교향악단의 레퍼토리 비율은 이전과 별로 다를 바 없는데, 다만 특정 외국 작품이 연주되었다는 것이 언론에 이렇게 자주 공표된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마 김정일이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형상화가 잘 되었다고 직접 칭찬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하게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제작한 CD에서도 확인된다.
국립교향악단은 북한 유일의 음반사인 '광명음악사' 에서 자신들의 단체명으로 된 CD 시리즈를 발매하고 있는데, 1집부터 14집까지는 전부 1970년대 이후의 북한 창작곡들로만 채워져 있다. (1-9집은 2000년 제작, 10-12집은 2003년 제작, 이후의 것은 불명확하나 대략 2004~2006년 제작으로 추정됨)
그러던 시리즈가 15집부터는 '외국음악집' 이라는 부제를 내걸었고, 지금까지 세 장의 CD가 발매되었다(15-17집). 그 '외국음악집' 의 첫 타자로 나온 것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전곡(김호윤 지휘)이었다. 외국 클래식 작품으로만 채워진 CD가 북한 음반사에서 발매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덧붙여 이 CD는 북한제 음악 CD 중 가장 긴 러닝타임을 기록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북한제 CD는 수록 시간이 45분 전후라고 한다.)
이후 발매된 16집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와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그리고 국립교향악단 소속 작곡가들인 김정희, 한광언, 강수기 등이 채보하고 편곡한 '이탈리아 명곡', '러시아 리듬묘사곡' 등의 메들리들이 수록되어 있다. 17집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상곡' 과 중국 집체작인 피아노 협주곡 '황하(랑랑이 도이체 그라모폰에 녹음했던 곡)' 가 들어 있다.
물론 예전에도 피바다가극단 소속 여성저음(알토) 가수인 조청미나 만수대예술단 소속 여성고음(소프라노) 가수인 리향숙 등이 자신들의 솔로 앨범에 비제와 생상의 오페라 아리아나 러시아 민요 등을 커플링한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완전 외국곡' 으로만 세 장의 CD가 연속으로 발매된 예는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최초의 사례다.
민족21에서 지휘자 김호윤이 서양 레퍼토리의 연주에 관해서 언급한 말은, 국립교향악단의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조선곡과 외국곡의 연주에서 나타나는 차이' 를 해소해야 하며, '유럽의 작품들에서도 뛰어난 합주력을 기를 수 있어야 된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김호윤은 베를린의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수학한 '해외파' 지휘자이다.)
물론 이러한 언급은 순음악적인 견지에서 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인터뷰가 이루어진 시기 동안에 행해졌던 북한 언론들의 보도와 김정일의 특별한 언급 등을 생각해 보면 북한 문화예술 정책이 변화하는 흐름에 맞춘 발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다른 북한 예술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국립교향악단도 기본적으로 조선노동당의 통제를 받는 국영 악단이며, 악단의 운영과 공연에 관해서도 지휘자보다 지도위원회 등 당 관련 부서의 입장이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립교향악단의 적극적인 서양 레퍼토리 취급이 과연 지속성을 띄고 계속될 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될 듯하다. 이는 북한의 '우물안 개구리' 식 문화예술 정책의 미묘한 변화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추가사항: 김호윤 지휘의 조선 국립 교향악단이 녹음한 쇼스타코비치 CD는, 웹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쇼스타코비치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하는 아래 사이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의 CD 커버 짤방도 볼 수 있음)
하지만 연주 평점은 첼리비다케 지휘의 베를린 필 연주와 함께 최하위 점수인 별 두개 반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어 번역기를 돌려서 보니까 '템포 설정과 해석은 평균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신디사이저가 연주한 것 같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소리' 라고 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