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의 '발트토이펠 왈츠곡집' 과 함께 맡긴 LP였는데, 물론 국내 라이센스판이었다. 살 때부터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것이었고, 특히 B면의 상태가 거의 이뭐병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CD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레어 품목' 의 가치는 충분했다.
ⓟ 1976(?) Philips Classics Productions
필립스에서 1976년 쯤에 출반한 LP인데, 하이든의 교향곡 85번 '왕비(La Reine)' 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장난감 교향곡(Kindersinfonie)' 이 A면에 실려 있고, B면에는 역시 하이든의 교향곡 55번 '교장(Der Schulmeister)' 이 수록되어 있다.
연주는 파리의 라무뢰 관현악단(Orchestre des Concerts Lamoureux)이었고, 지휘는 이탈리아계 프랑스 지휘자인 로베르토 벤치(Roberto Benzi)가 맡은 앨범이었다. 악단과 지휘자 모두 좀 '용두사미' 격인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특이한 음반이었다.
그리고 나온 지가 꽤 된 음반이다 보니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는 물건이었다. '장난감 교향곡' 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작품임이 밝혀진 지 꽤 됐지만, 그 때까지는 계속 하이든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곡을 하이든 작품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하이든의 두 교향곡 중 85번은 82-87번의 '파리 교향곡집' 에 묶여 있는 곡이라서 음반을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은 곡이다. 하지만 55번은 소위 네임드 심포니(named symphony. 제목 붙은 교향곡)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곡인데, 메이저 음반사에서 전집물이 아닌 앨범으로 나온 것이 정말 이례적이었다.
지휘를 맡은 벤치는 로린 마젤과 함께 '천재 소년 지휘자' 로 상당히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1937년생으로 피아노 강사였던 아버지에게 세 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불과 3년 뒤 무대에 서 '신동' 의 경력을 시작했다. 2차대전 중에는 이탈리아로 잠시 옮겨 살다가, 1947년에 프랑스로 돌아와서 앙드레 클뤼탕스에게 지휘를 배웠고 1년 뒤에 바욘과 파리에서 지휘자로 데뷰했다. 불과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이 유명세를 타서 영화 '영광의 전주곡(1949)' 과 '운명의 부름(1950)' 에도 출연했고, 1954년에는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를 지휘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뷰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58년부터 시작했는데, 1959년에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비제의 '카르멘' 을 공연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를 누비게 되었다.
1973년에는 신생 악단인 보르도-아키텐 국립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이후의 경력은 좀 석연치 않다. 유례 없는 신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 악단이나 음반사들이 그에게 지휘자 자리나 녹음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떠한 이유로 음악 활동에 브레이크가 걸렸는지는 몰라도 음반도 상당히 적었고 주요 직책도 데뷰 때의 그것에 비교하면 초라했다.
벤치의 음반은 EMI와 필립스, 포를란(Forlane), 낙소스 등지에 약간씩 남아 있는데, 그나마 물량이 충분해 동나는 일이 별로 없는 낙소스를 빼고는 지금까지 꾸준히 유통되고 있는 음반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LP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아는 한 CD로 재발매된 일도 없다.
벤치의 하이든 해석은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는데, 요즘 날고 기는 소위 '원전 연주' 단체들처럼 괴팍하거나 요상하지는 않지만 '기름기를 뺀' 스타일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라이트너나 켐페 등의 올드 타입 지휘자들이 대규모 관현악을 동원하고 느린 템포에 두꺼운 텍스처까지 입혀 '빅 밴드' 스타일의 연주를 선보인 것에 비하면 많이 '젊은' 연주였다.
템포도 비교적 빠르게 잡았는데,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듯한 카라얀의 연주(DG)와 확실히 대조되는 85번 '왕비' 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느린 악장 격인 2악장까지도 속도 기호가 알레그레토인 점을 감안한 해석인 듯하다. (어떻게 보면 원곡 자체도 베토벤 교향곡 7번과 상당히 비슷한 템포 설정이다)
1악장의 느린 서주 뒤에 오는 비바체(Vivace)의 주부는 정말 상쾌하고 거침이 없는 쾌연이었다. 로만체(Romanze)인 2악장과 미뉴에트인 3악장도 아주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고, 마지막 악장인 4악장에서는 빠른 템포 속에서도 프레이징이나 악센트를 세심하게 통제해 흥분 상태가 되는 것을 막고 있다.
한숨 돌리는 막간극처럼 집어넣은 '장난감 교향곡' 은 누가 해도 대동소이한 곡이다. 스트링만의 편성에 장난감과 새소리, 스네어 드럼을 집어넣은 곡인데, 이 곡의 녹음에서는 솔직히 연주가들 보다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의 역량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2악장에서 사용한 새소리는 상당히 섬세하게 편집되어 있었고, 스트링의 연주에서 삐져나오는 일이 없어서 꽤 인상이 좋았다.
B면에서 이어지는 하이든의 55번 '교장' 은 해설에도 쓰여 있듯이, 중기 작품임에도 85번과 꽤 비슷한 곡이다. 플랫(b) 조성이며 2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에스테르하지 집안에서 탄생된 여타 작품들이 그렇듯, 좀 판에 박힌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교장' 이라는 이상한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레어 레퍼토리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 곡이다.
이 곡의 연주도 85번 '왕비' 와 마찬가지의 입장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여흥 음악' 의 특성을 살렸는지 좀 느긋한 느낌이고, 미뉴에트인 3악장의 중간부에서는 현악기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첼로는 한 대만 연주하도록 해 당시의 악기 편성법과 절충하고 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중기 시절까지 자신들의 교향곡에서 스트링을 종종 바로크 시대의 합주 협주곡처럼 다루곤 했음)
요즘도 통하는 '정공법' 을 썼음에도 결코 지루하거나 늘어지는 일이 없는 하이든 연주는 정말 듣기 힘든 것인데, 벤치가 지휘한 이 녹음이 딱 그랬다. 정말 '천재' 의 이름값을 하는 연주였다. 이러한 연주를 들려줬던 벤치가 왜 1970년대 이후로 그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가 정말 의문이다. 그 기세대로 몰아갔다면 적어도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이나 파리 관현악단 같은 톱 클래스의 악단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텐데.
라무뢰 관현악단도 벤치와 비슷하게 70-80년대를 거치면서 연주력이 급전직하했고, 결국 간간히 들어오던 DG나 필립스 같은 메이저 레이블과의 레코딩 건수도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나마 1993년에 일본의 사도 유타카를 지휘자로 맞아들이면서 다시금 재도약을 꾀하고 있다는데, 전통적으로 관현악 분야가 취약한 프랑스인 만큼, 하루 빨리 옛날의 명성을 찾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원본 LP의 상태가 많이 안좋은 탓에 복각된 소리라도 그다지 좋지 않다. 55번의 4악장 후반부에서는 소리도 한 번 씹히고, 제거하지 못한 서피스 노이즈나 디스토션도 종종 있으니 유념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