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흐름을 확 바꿔놓은 양차 세계대전 중 2차대전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것 뿐 아니라, 그 사상자들이 거의 군인에만 국한된 1차대전 때와 달리 민간인도 그에 맞먹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서 상당히 비극적인 일이었다.
특히 소련의 경우 군인 공식적인 집계만으로도 1370여만 명, 민간인 700여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이는 2차대전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비율이다. 이는 스탈린이나 군부, 정계 고위층의 삽질 때문에 빚어진 '개죽음' 도 있겠지만, 나치의 '유태인/집시/슬라브인 절멸계획' 때문에도 벌어진 참극이었다.
스탈린은 1941년에 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이 소련을 침공하자 '대조국전쟁' 을 선포하고 항전에 나섰다. 하지만 열악한 무기 체계에 고위 장교들의 대량 숙청 등이 더해져, 제대로 반격해 보지도 못하고 모스크바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어 공식 통계로 63만여 명의 시민이 굶어죽고 얼어죽거나, 독일군과의 항전에서 전사했다.
다행히 겨울 이전에 모스크바를 함락시킨다는 독일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독일군은 엄청난 추위 때문에 서서히 수세에 몰렸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대실패와 쿠르스크 전차전 등의 패배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소련군은 계속 서쪽으로 진격해 결국 베를린을 함락시켰다.
이 시기 동안 예술 분야에서도 전쟁 노력을 독려하거나, 독일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와 복수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중에도 분명히 옥석은 있었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교향곡 분야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9번이 '전쟁 3부작' 으로 남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소련군의 반격 시기와 맞물려 작곡된 8번이 내용과 형식의 균형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작품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전쟁 후기에 작곡된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5번도 전쟁 교향곡으로 분류되고 있고, 이들 네 교향곡은 연주 빈도도 비교적 높고 음반도 많다.
하지만 '전쟁 교향곡' 임에도 그다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곡이 또 하나 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와 함께 '소련 3인조' 작곡가였던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의 교향곡 제 2번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과 마찬가지로 반격기인 1943년에 쓰여진 작품이다. (1944년에 한 차례 개정됨)
이 곡은 '종' 이라는 부제-작곡자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님-도 가지고 있는데, 1악장과 4악장에서 튜블러 벨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당으로부터 '종교색이 짙다' 는 말도 안되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비난에 대해 하차투리안이 '그러면 낫을 망치로 두들기면 되겠구만' 이라는 냉소적인 대답으로 응수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낫과 망치는 소련 국기에도 그려져 있는 '노동자와 농민의 상징물' 이므로)
하차투리안은 그루지야에서 아르메니아인 제본공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중앙 아시아의 민속 음악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대표작인 발레 '스파르타쿠스' 와 '가야네', 바이올린 협주곡 등에서 토속적인 맛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 곡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나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등의 민속 음악풍 주제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성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강렬한 분노의 에너지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에서처럼 닭살이 돋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소름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와 탄식, 절망 등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전쟁 이전이라면 이러한 요소는 '반혁명적' 이라고 해서 단죄 대상이었겠지만, 전쟁의 참화가 그러한 표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물론 전후에는 다시 비판되었지만)
특히 1악장이 압권인데, 튜블러 벨이 합세한 '절규하는' 서주부터 화가 잔뜩 난 인상이다. 거기에 비올라의 토속적인 주제로 이어지는 주부(2:04~)는 엄청나게 드라마틱한데,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연상케 하는 관악기, 격렬한 백병전을 연상시키는 타악기와 스트링의 한바탕 질주 등이 정신없이 이어진다.
이 때문에 서방에서는 이 곡을 '시끄러움의 극치' 라고 비꼬기도 했는데, 물론 소음 수준은 아니지만 최강주 부분에서는 이웃집에 미안할 정도로 엄청난 음량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음산하고 광포한 전곡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비교적 낙천적인 분위기의 2악장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데, 특히 피아노가 대활약하는 패시지가 그렇다. (오케스트라에 피아노를 포함시킨 사례 중 가장 효과적인 예로 꼽을 만하다. 노다메가 좋아하겠구만) 다만 쇼스타코비치처럼 대놓고 신랄하지는 않다.
추도와 장송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3악장은 튜블러 벨 사용과 함께 당의 비난을 가장 많이 받은 대목이었는데,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과 생상의 '죽음의 무도' 에서처럼 그레고리오 성가의 유명한 가락인 '분노의 날(Dies irae)' 을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서사풍의 가라앉은 느낌이 상당히 진하게 배어 있다.
하지만 당은 이러한 계통의 작품에서 항상 '해피 엔딩' 을 요구하고 있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아예 교향곡 5번을 축전적이고 장엄한 장조의 곡으로 만들었고, 쇼스타코비치는 7번을 전통적인 '장엄한 종결부' 로 끝냈지만 8번은 고요한 정적으로 끝맺어 당을 엿먹였다. 심지어 9번에서는 아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소란스러운 코다를 사용해 결국 당 간부들과 정치인들을 분노케 했다.
하차투리안은 전반부 세 악장의 가라앉고 분노에 찬 분위기를 일색하기 위해 '어두움을 뚫고 밝음으로' 라는 베토벤 중기 스타일의 길을 택했다. 네 대의 호른이 연주하는 첫 주요 주제(1:04~2:17)는 브람스 교향곡 1번 4악장의 그것과 닮아 있고, 종결 직전까지 1악장 서주의 튜블러 벨 에피소드가 따라다니며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지만, 결국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상징하는 강렬한 E장조의 화음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4악장을 보는 시각은 저마다 틀린데, 하차투리안이 당의 노선에 지나치게 영합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의도를 정치적이 아닌 순수한 '승리의 메시지' 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없이 질주하는 프로코피에프의 5번 보다는 그래도 무게감이 있고 서사적인 엔딩이라 나름대로 괜찮게 들었다.)
지휘자로서도 활동한 하차투리안은 주로 자작곡을 가지고 연주회를 많이 열었는데, 2차대전 후에는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도 출연했다. 그 결과물이 EMI와 데카 등 서구 음반사에 몇 가지 음반으로 출반되기도 했는데, 이 곡도 데카의 음반으로 서방에 처음 알려졌다.
데카반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의 연주인데, 1962년 3월 8-11일 4일간 데카의 전용 스튜디오처럼 쓰였던 소피엔잘에서 녹음되었다. 이 때 녹음된 곡들은 이 교향곡 외에 발레 '가야네' 와 '스파르타쿠스' 의 발췌였는데, 발레 곡들의 경우에는 최근에 96kHz의 최신 리마스터링을 거친 CD까지 계속 나오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녹음이다.
하지만 교향곡의 경우에는 서방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인지 어쨌는지, CD로는 데카의 '더블 데카(Double Decca)' 시리즈로 나왔다가 지금은 자취를 감춘 상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회현 지하상가에서 찾은, 소리 질이 조금 떨어지는 1990년 미국산 CD다. 아래 짤방 참조)
ⓟ 1990 Decca Record Company Limited
최근에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빈 필을 지휘해 내놓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녹음에서 러시아 악단풍의 강한 소리를 그대로 뽑아낸 것에 놀란 평론가들이 앞다투어 평을 쓴 바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하차투리안이 녹음한 이 교향곡이 그 선구자 역할을 한 것 같다. 물론 특유의 심벌즈나 팀파니, 오보에 사운드 때문에 빈 필 연주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빼면 전혀 빈 필 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 만큼 이 곡이 요구하는 다이내믹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카의 녹음 외에는 마찬가지로 하차투리안이 직접 소련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이 더 있는데, 이 녹음은 소련 시절의 대부분 녹음이 그렇듯 서방의 그것보다는 녹음된 소리의 질이 좋지 않다고 한다.
하차투리안의 이 두 가지 자작자연 외에는 이렇다할 음반도 보이지 않고 있는데, 기껏해야 로리스 체크나보리안의 음반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하차투리안이 교향곡 분야의 프로페셔널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뒷맛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2차대전 동안 예술 분야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 과 '인생을 위한 예술' 이 날카롭게 대립한 극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전자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피츠너 같은 경우에는 예술을 위한 자유가 보장된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놀아나든 상관 없다는 입장에서 나치 치하의 독일에 남았고, 전후 그 이유로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물론 '인생을 위한 예술' 의 견지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활동상이나, 창작된 작품들의 경향이 모두 그 시대의 사회상과 인생관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 라는 표어 아래 무수히 쏟아져 나온 소위 '3류 정치 선전물' 들은, 나치 시대의 히틀러 찬양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가치가 거의 없는 것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당의 압력과 힘겨운 전쟁통이라는 상황 속에서 뭔가 '행간' 을 남기고자 한 예술가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 '행간' 을 과연 찾아볼 수 있는 가가, 아마 이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과 예술 작품들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될 것이다. 하차투리안의 이 교향곡은 과연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