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는 지난 번 주페 서곡집 때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오페레타 류의 '가벼운' 음악 전문가라는 인식이 강한 작곡가다. 하지만 첼로 소품인 '자클린의 눈물' 을 비롯한 애수 넘치는 곡들도 종종 썼으며, 말년에는 오페레타의 영역을 벗어나 본격 오페라인 '호프만의 이야기' 를 작곡하기도 했다.
사실 '가벼운' 음악을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음악 어법 자체가 가볍다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러한 가벼운 음악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은 그 만큼의 대중적인 센스가 충만해 있다는 반증도 되고, 또 몇 년 지나면 잊혀지는 단발성이 아닌 지금까지의 영원성을 획득하고 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오펜바흐는 비제가 '카르멘' 으로 오페레타 혹은 그에 준하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가 장악하던 파리 음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도매금으로 잊혀져 갔는데, 그러한 오펜바흐의 지위를 발레 형태의 리메이크로 다시금 일으켜 세워준 이가 있었다.
바로 마뉘엘 로장탈(Manuel Rosenthal, 1904-2003)이었는데, 현재 최장수 작곡가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며 라벨의 공인된 마지막 제자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일하다가 2차대전 중에는 포로 신세를 지기도 한 인물이었는데, 전후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 시애틀 교향악단과 리에주 교향악단 음악 감독, 파리 음악원 지휘과 교수 등을 지낸 바 있다.
하지만 로장탈의 이러한 경력 뒤에는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가 있었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활동했는데, 오페레타부터 진지한 관현악 작품까지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작품을 남긴 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혹은 편곡)으로 지금까지 유명한 것은 오펜바흐의 여러 오페레타들에서 주제를 빌어 발레로 재창작한 '유쾌한 파리지엔' 정도 뿐이다.
'유쾌한 파리지엔' 은 1938년에 안무가인 레오니드 마신의 위촉으로 만들어 졌는데,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된 이후로 지금까지 희극 발레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공연되고 있다. 레코드도 여러 장이 나왔는데, 카라얀을 비롯한 명지휘자들의 녹음도 많다. (물론 로장탈 자신도 EMI와 낙소스 등에서 음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코너의 특성상, 그보다 좀 덜 알려진 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쾌한 파리지엔' 의 성공 때문에 다른 안무가들이 그러한 스타일의 작품을 여러 곡 주문했는데, 1955년에 마르셀 아샤르(Marcel Achard)와 로베르 마뉴엘(Robert Manuel)이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아름다운 엘렌(La belle Hélène)' 을 1막 3장의 코믹 발레 대본으로 만든 것도 이러한 계획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의 작곡가로 선정된 이는 로장탈이 아니라, 로장탈과 마찬가지로 라벨의 제자였던 루이 오베르(Louis Aubert, 1877-1968)였다.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해 라벨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를 초연하고 헌정받은 인물이기도 했는데, 영화음악과 극음악 분야에서도 잔뼈가 굵은 작곡가였다. 하지만 아샤르와 마뉴엘이 너무 촉박한 기한 내에 완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초벌로 쓸 피아노 편곡 정도를 간신히 만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마감의 압박을 못이긴 오베르는 후배인 로장탈에게 관현악 편곡(오케스트레이션)을 부탁해야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것이 발레 부프(희극 발레) '아름다운 엘렌' 이었고, 파리 오페라극장-참고로 1980년대 후반에 새로 지어진 바스티유가 아닌, 현재 '가르니에 오페라극장'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우여곡절 많은 발레 리메이크는 물론 오베르의 뼈대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오히려 로장탈의 화려한 관현악 편곡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유쾌한 파리지엔' 에서 몇몇 부분을 직접 작곡해서 삽입한 예가 있듯이, 이 편곡에도 로장탈이 아니면 낼 수 없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로장탈은 관현악 편곡을 하면서 라벨에게 전수받은 모든 테크닉을 사용했는데, 특히 피아노를 포함한 타악기를 다양하게 배치하거나 트럼펫의 와와 뮤트를 사용한 개그 패시지(19:31~20:01) 등 재즈풍 요소, 심지어는 불협화음(20:48~20:59)까지 과감히 사용하는 등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관현악의 각 파트, 특히 관악기에 까다로운 개인기를 종종 요구해 가벼운 음악임에도 결코 안이하게 연주할 수 없도록 치밀한 계산까지 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을 들을 때 꼭 '아즈망가 대왕' 이나 '스쿨럼블' 같은 자지러지는 코믹 만화를 같이 봐주는 습관이 있다. 그만큼 음악이 재미있고 신선하기 때문인데, 단막 작품이라 러닝 타임이 47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그리고 이 발레가 '유쾌한 파리지엔' 처럼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도 더더욱 안타깝다.
'아름다운 엘렌' 의 발레 판은 초연 당시의 센세이션을 입증하듯, 1년 뒤에 곧바로 EMI 프랑스 지사에서 음반이 나왔다. 1956년에 로베르 블로(Robert Blot) 지휘의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관현악단(Orchestre du Théâtre National de l'Opéra de Paris)이 연주한 것인데, 이것이 지금 현재 이 곡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반이다. 1994년에 프랑스 EMI가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리즈 중 하나로 재발매하기도 했는데(2 for 1. '유쾌한 파리지엔' 축약판과 발트토이펠의 왈츠 여섯 곡 등 포함), 이것도 나온 지 12년이나 흘렀기 때문에 폐반되어 버렸다.
ⓟ 1994 EMI France
20세기 오펜바흐 부활의 주역이었던 로장탈 또한 평생 '경음악 전문가' 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는데, 그의 재능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다. 지휘 활동의 부산물로 남긴 음반들도 대부분 협주곡의 반주나 자작의 희극 작품에 그쳤고, 그 때문에 그러한 평가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하여튼 음악 자체는 너무 재미있다. 나의 청취 방식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시도해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클래식 계열 음악에서 이렇게 코믹 만화와 잘 어울리는 곡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