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에서 들었던 바깥 소식 중 가장 기뻤던 것은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에 대한 국정원의 재조사 발표였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수준보다 훨씬 약한 '우회적인 자기 비판' 이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저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 중 한 명이 윤이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주 미미하지만 그의 유해가 고향 땅에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싶을 정도인데, 물론 유족 측의 입장은 아직까지 유보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를 어떻게 잘 맞춰서 윤이상 관련 신보들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리뷰하고자 하는 것이 신나라레코드에서 나온 아래의 CD다.
윤이상과 일본과의 관계는 미묘한 애증 그 자체였는데, 청년 시절 그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하고 도망자로 전전하게 한 주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음악을 배우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친 제자들 중 상당수가 일본인이었는데, 호소카와 도시오나 마츠시다 이사오 같이 거물급 작곡가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중에는 재일교포 지휘자인 김홍재도 있는데, 윤이상의 네 번째 교향곡인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 의 세계 초연(1986.11.13 도쿄 산토리홀)을 듣고는 윤이상 음악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에 자신의 데뷰 10주년 기념 연주회 겸 제 1회 한겨레 음악회에서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 1981)' 를 무대에 올렸고, 2004년에 오페라 '유령의 사랑' 을 통영에서 지휘한 것까지 총 14 편의 윤이상 작품을 일본 또는 아시아 초연했다.
윤이상에게 직접 배운 탓도 있기 때문에 김홍재의 윤이상 작품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각별한데, 가령 2000년에 남한 무대에서 처음으로 지휘대에 섰을 때에도 첫 곡을 윤이상의 '무악' 으로 선택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무궁동' 과 '유령의 사랑' 을 그의 지휘로 연주회장에서 처음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저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 중 한 명이 윤이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주 미미하지만 그의 유해가 고향 땅에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싶을 정도인데, 물론 유족 측의 입장은 아직까지 유보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를 어떻게 잘 맞춰서 윤이상 관련 신보들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리뷰하고자 하는 것이 신나라레코드에서 나온 아래의 CD다.
윤이상과 일본과의 관계는 미묘한 애증 그 자체였는데, 청년 시절 그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하고 도망자로 전전하게 한 주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음악을 배우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친 제자들 중 상당수가 일본인이었는데, 호소카와 도시오나 마츠시다 이사오 같이 거물급 작곡가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중에는 재일교포 지휘자인 김홍재도 있는데, 윤이상의 네 번째 교향곡인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 의 세계 초연(1986.11.13 도쿄 산토리홀)을 듣고는 윤이상 음악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에 자신의 데뷰 10주년 기념 연주회 겸 제 1회 한겨레 음악회에서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 1981)' 를 무대에 올렸고, 2004년에 오페라 '유령의 사랑' 을 통영에서 지휘한 것까지 총 14 편의 윤이상 작품을 일본 또는 아시아 초연했다.
윤이상에게 직접 배운 탓도 있기 때문에 김홍재의 윤이상 작품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각별한데, 가령 2000년에 남한 무대에서 처음으로 지휘대에 섰을 때에도 첫 곡을 윤이상의 '무악' 으로 선택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무궁동' 과 '유령의 사랑' 을 그의 지휘로 연주회장에서 처음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