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지체없이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77)을 꼽는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희극 영화를 보고 숨이 막힐 정도로 웃어댔고, 이제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 영화 속에 내재된 어둡고 비극적인 요소들을 천천히 맛보고 있는 중이다.
채플린은 어렸을 적부터 런던의 빈민굴에서 자라났고, 아버지의 외도와 어머니의 정신 질환 등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상당히 혹사당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무대에 오르기만을 꿈꾸고 있었고, 결국 희극 배우로 입신해 미국으로 건너가 위대한 영화인의 반열에 들었던 입지전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경력 만큼이나 이런저런 스캔들과 비극적인 에피소드는 빛과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요즘 같으면 극렬 로리콘 소리를 듣고도 남을 미성년자들과의 결혼과 이혼, 좌파 인사들과의 친분 때문에 생긴 '빨갱이' 라는 루머는 채플린의 인생에서 가장 큰 마이너스 요소로 꼽힌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그가 제 2의 조국으로 여겼던 미국 땅을 떠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자신의 영화에 줄곧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삽입하던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1940)' 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을 비판하고 평화를 주제로 한 일장 연설을 클라이맥스로 삽입했는데, 이는 당시 보수주의자들에게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2차대전 직후 미-소 냉전 속에서 채플린은 매카시즘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때마침 터져 나온 조안 배리 스캔들-조안 배리라는 여인이 채플린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한 사건. 혈액 검사 결과 무죄임이 판명되었지만 법정에서 기각시킴-과 함께 채플린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절친한 작곡가였던 한스 아이슬러를 구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했다.
채플린의 회고담 격인 영화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 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착수한 작품이었고, 그가 미국에서 제작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여기서 채플린은 자신이 어렸을 적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던 런던의 빈민가 풍경과 연극 무대의 추억을 듬뿍 담았고, 자신의 역할을 늙은 퇴물 코미디언으로 설정해 당시 미국 사회가 그에게 가했던 비난으로 받은 상처도 그려냈다.
한 때 잘 나가던 희극 배우였던 칼베로(찰리 채플린)는 런던의 한 싸구려 여인숙에서 기거하던 중, 같은 집에 세들어 살던 젊은 발레리나 테리(클레어 블룸)가 가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그녀를 구해준다. 다리가 마비되는 바람에 희망을 잃었음을 알게 된 칼베로는 그녀가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테리가 걸을 수 있게 되고 다시 무대에 서는 동안, 칼베로는 그 자신이 재기하고자 하는 노력이 번번히 물거품이 되면서 점차 삶의 목표를 잃어간다. 그리고 발레 음악 작곡가인 네빌(시드니 채플린)이 테리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된 칼베로는 조용히 테리 곁을 떠나간다.
몇 달 후 칼베로는 우연히 테리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테리의 무대에 특별 출연하게 된 칼베로는 오랜만에 자신의 끼를 최대한 발휘해 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하지만 알콜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해 공연 직후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무대 뒤에서 테리의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비극적인 스토리 만큼이나 조역과 카메오의 파격적인 기용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칼베로와 테리 이외의 조연들은 거의 자신의 가족들을 캐스팅했는데, 특히 첫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인 시드니와 찰스 2세(어릿광대 역으로 출연)는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이었던 제럴딘, 조세핀과 마이클은 영화 초반에 여인숙 앞에서 서성대는 꼬마들로 출연했고, 이 중 제럴딘은 첫 대사-"앨솝 아줌마 나갔어요!"-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파격적인 캐스팅은 칼베로의 마지막 무대에서 같이 등장하는 피아니스트 역이었는데, 바로 채플린과 함께 미국 희극 영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이었다. 슬랩스틱 개그의 대가로 손꼽히던 키튼은 발성 영화가 발명되자 슬럼프에 빠져 영화계를 사실상 떠난 상태였다. 한때 라이벌이었던 이 두 늙은 희극 배우의 공동 출연은 그 자체로도 역사적인 일이었다.
채플린은 이 영화에서 '시티 라이트' 이래로 그랬듯이 직접 영화 음악을 작곡했고, 극 중에서 네빌의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로 나오는 발레 음악인 '라임라이트의 테마' 는 우리 나라에서도 모 영화 프로그램의 오프닝 BGM으로 쓰이는 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 장면과 여인숙 장면 등 몇몇 부분에서는 채플린이 직접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왼손잡이라서 악기를 거꾸로 잡고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미 미국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채플린은 이 영화를 미국이 아닌 런던에서 최초 개봉하고자 했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으로 향하던 중 채플린은 배 위에서 미국 법무부가 자신의 비자를 말소시켰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는 지체없이 미국 영주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에서 개봉된 '라임라이트' 는 자국의 희극 대가가 만든 영화라는 이점도 있어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영화를 기점으로 채플린의 영화 인생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제작한 두 편의 영화인 '뉴욕의 왕(A King in New York, 1957)' 과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은 그의 전작 영화들에 비하면 미적지근한 평을 받았으며,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졸업',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의 혁신적인 작품들에 밀려 '철지난 희극 영화' 라는 혹평을 받았다.
비록 전성기 때처럼 배꼽잡게 웃기는 장면은 별로 없지만, 이 '라임라이트' 는 채플린이 신조로 삼았던 '희극 속의 비극성' 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칼베로가 꿈 속에서 벼룩 서커스를 열심히 연기하다가 관객석을 보고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이나, 술에 취한 채로 친구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은 그 황량함이나 좌절감을 여과 없이 전달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테리가 첫 재기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리가 예전처럼 말을 안듣는다고 울부짖는 장면. 테리는 도저히 무대에 나갈 수가 없다고 하며 극장을 떠나려 하지만, 칼베로는 계속 그녀에게 무대에 나가라고 재촉한다. 결국 손찌검까지 하면서 테리를 무대에 내보낸 칼베로는 절박한 마음에 무대 뒤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그녀가 멋지게 춤을 추는 광경을 가슴 졸이며 지켜본다.
이 장면에서 채플린이 보여준 내면 연기는 내 생각으로는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 1925)' 에서 보여준 쓸쓸한 표정과 함께 최고라고 여겨진다. 채플린은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 에 나오는 어릿광대 주인공 만큼이나 희극인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이 영화가 단순히 웃기려고 만든 영화가 아닌 진지한 작품임을 역설하고 있는 듯 하다.
마지막으로 채플린이 그토록 강조했던 '희극 속의 비극성' 에 대해 쓴 문구를 인용하고 싶다.
"역설적이지만, 한 편의 희극을 창조함에 있어서 그 희극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이용되는 것은 비극성입니다. 희극성이라는 것이 반항적인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자연 앞에 선 우리의 미약함을 발견하고 취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이란 웃음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미쳐 버리고 말겠지요."
-찰리 채플린, 자서전 '나의 삶(1964)'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