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글의 주제인 주페(Franz von Suppé, 1819-1895)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고, 잠시 샛길로 빠져 보겠다.
'캉캉' 하면 요즘에는 간혹 중독성이 농후한 LPG의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주종은 프랑스 작곡가인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지옥의 오르페)' 서곡일 것이다. 하지만 오펜바흐가 항상 이러한 '시끌뻑적지근한' 음악만 써댄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그는 작곡가이자 첼리스트였으며, 국내 드라마 '옥이 이모' 에 인상적으로 삽입되었던 소품 '자클린의 눈물' 을 작곡하기도 했다. '자클린...' 은 제목이 상징하듯, 애수가 넘치는 아주 매혹적인 소품이다. 뱀다리를 더 달자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까지도 (오펜바흐 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작품을 세 곡이나 남기고 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오펜바흐 이야기가 나왔는지는...나도 잘 모르겠다. (????) 하지만 오펜바흐 하면 첼로가 떠오르듯이, 주페 하면 나도 첼로가 떠오른다. 첼로를 취미삼아 배운 만큼, 첼로로 멋진 음악을 쓴 작곡가의 대열에 주페를 억지로라도 넣고 싶은 심정 때문인지 어쩐지. 그리고 이 첼로라는 악기는 밑에 소개할 음반의 지휘자와도 무척 인연이 깊은 악기이기도 하다.
일단 주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주페는 본명이 '프란체스코 에제키엘레 에르메네질도 카발리에레 주페 데멜리' 다. 독일어는 하나도 없는 이름인데,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의 영향력이 미치던 유고슬라비아의 달마티아 지방 출신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빈으로 이주한 뒤 '프란체스코' 를 독일어의 '프란츠' 로 바꾸고, 기사 작위인 '카발리에레' 는 간단히 '폰(von)' 호칭으로 줄인 것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프란츠 폰 주페' 라는 이름의 유래다.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뒤 주페는 주로 오페레타와 발레 등 당시 유행하던 가벼운 극장 음악을 위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이미 오펜바흐의 작품이 빈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주페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양식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빈에서 유행하던 왈츠나 폴카 등을 퓨전시켜서 초기의 빈 오페레타 양식을 정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비록 후배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워낙 득세한 까닭에, 주페의 오페레타 중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상연작은 기껏해야 '보카치오' 밖에 없지만.
주페는 소년 시절 플루트를 연주했다고 하는데, 빈에서 극장 음악에 몸담게 되면서 부터는 첼로라는 악기에도 꽤나 신경을 쓴 것 같다. 두 편의 오페레타 서곡에서 아주 매력적인 첼로 솔로 구절을 넣었으니 말이다. '시인과 농부(Dichter und Bauer)' 와 '빈의 아침, 낮, 밤(Ein Morgen, ein Mittag, ein Abend in Wien)' 두 곡인데, 이 두 곡은 주페의 서곡 중 가장 유명한 '경기병(Leichte Kavallerie)' 보다도 더 자주 듣는 레퍼토리들이다. 여하튼 주페의 오페레타 서곡들은 오페레타 내용을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연주회 무대에서 맛깔스러운 전채나 디저트(앵콜)로 자주 공연되고 있다.
주페의 서곡들 중 유명한 곡은 위의 세 곡 외에도 '유쾌한 도둑(Banditenstreiche)', '아름다운 갈라테아(Die schöne Galatea)', '스페이드의 여왕(Pique Dame)' 등이 있는데, 이 여섯 곡이 LP 시대부터 지금까지 주페의 서곡집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레퍼토리들이다. (LP보다 더 수록 공간이 많아진 CD 시대에 들어서는 '보카치오' 와 '파티니차(Fatinitza)' 같은 곡들을 더 끼워서 내놓는 경우도 많음)
이 여섯 곡을 처음 접한 것이 카라얀+베를린 필의 음반(도이체 그라모폰)이었는데, 지금도 카세트 테이프로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CD의 경우 이 여섯 곡을 온전히 담은 음반은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의 여백으로 수록한 것이 전부인데, 레하르의 오페레타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구입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라얀이라는 이름 자체가 내게 부정적으로 각인된 지도 오래였고, 이 여섯 곡을 담은 음반은 전혀 예상 외의 음반사와 연주로 다시 접할 수 있었다.
프랑스+이탈리아 혈통에 영국인이라는, 빈 오페레타와는 별로 매칭이 안되는 지휘자 존 바비롤리가 맨체스터에 본거지를 둔 할레 관현악단과 연주한 음반이었는데, 최근에 영국의 듀턴(Dutton)이라는 복각 전문 음반사에서 바비롤리 에디션 시리즈로 딸려나온 것이었다. 주페의 여섯 서곡 외에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등의 왈츠, 폴카, 서곡 등이 같이 수록된 더블 앨범-가격은 2 for 1으로 교보문고 기준 15000원대-인데, 사실상 이 음반은 주페만 들으려고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 2002 Dutton Laboratories
바비롤리와 할레 관현악단은 1950년대에 영국의 파이(Pye)와 상당히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6번과 드보르작 교향곡 7-9번, 말러 교향곡 1번, 닐센 교향곡 4번,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같은 본격적인 교향곡 레퍼토리들 외에도 수많은 관현악 소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이의 녹음은 솔직히 소리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 기백만은 이후 녹음들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에 지금도 꾸준히 재발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주페 서곡집은 1957년 6월 28-29일 이틀 동안 녹음된 것인데, '머큐리(Mercury)' 라는 레이블 이름으로 유명한 제작진들-프로듀서 윌마 코자트(Wilma Cozart)+해롤드 로렌스(Harold Lawrance)와 엔지니어 로버트 파인(Robert Fine)-이 주축이 되어 제작했다. 이들은 파이 녹음의 대부분을 제작한 프로듀서 로버트 오거와 엔지니어 더글러스 테리 보다는 그래도 소리를 좀 더 자연스럽게 잡아내는 인물들이었고, 이 서곡집도 마찬가지다.
원래 첼리스트 출신 답게 바비롤리는 스트링 파트의 다채로운 연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위에 썼던 첼로 솔로 악구들 뿐 아니라 고혹적인 왈츠 멜로디와 통통 튀는 폴카/갈롭 리듬도 생동감있게 연출하고 있다. 물론 '경기병' 같이 금관이 주축이 되는 행진조의 힘찬 곡에서는 50년대의 기백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고, 타악기 사용이 좀 과다하다 싶은 부분은 과감히 첨삭하는 등 올드 타입 지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실제로 '유쾌한 도둑' 이나 '시인과 농부', '빈의 아침, 낮, 밤' 서곡의 코다는 심벌즈 주자가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별히 '빈 식' 의 연주만 찾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불평불만을 늘어 놓겠지만, 유럽 자체에서 한참 떨어져 사는 바비롤리 빠돌이인 나로서는 이 연주에 특별히 반감을 가질 이유도 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