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재개해 봅니다. 하도 쉬다 보니 머리가 굳어버려서 글이 잘 안나오는 것이 짜증나기는 해도, 쓰다 보면 어느 정도 필력이 살아날 듯 합니다.)
ⓟ 2000 HNH International Ltd.
19세기는 그야말로 '마에스트로' 들의 시대였다. 음반이라는 것이 없던 시대였던 만큼 연주회도 많았고, 몇몇 명연주가들은 즉흥 연주 솜씨를 과시하거나 직접 창작에 뛰어들어 수많은 곡들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리스트와 쇼팽 같은 이들이 있는데, 이들의 피아노 작품은 당시 피아니스트들이 얼마나 뛰어난 표현력과 기교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위의 두 거장들 외에도 당시 피아노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사람들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단순히 '피아니스트' 정도로 음악사에 남아 있을 뿐인데, 최근에 와서야 영국 음반사 하이피리언(Hyperion)이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 컬렉션' 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야 재조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의 프로젝트에는 베버, 멘델스존, 생상, 마스네나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작곡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남긴 협주곡도 있지만, 헨젤트나 브륄, 모셸레스, 샤르벤카, 자우어, 드레이쇼크, 쿨락 등 작곡가로서는 생경한 이들의 곡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저 시리즈에서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레셰티츠키(Theodore Leschetizky, 1830-1915)도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였다.
레셰티츠키는 폴란드 출신으로, 불과 아홉 살때인 1839년에 피아노 교본의 대명사인 칼 체르니가 작곡한 소협주곡을 연주해서 데뷰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1841년에 빈으로 이주해 체르니의 수제자가 되었고, 3년 후에는 자신이 제자를 받아 가르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1845년에는 빈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기 시작하는 한편, 당대의 유명 음악 교사였던 지몬 제히터-참고로 브루크너도 이 사람에게 대위법을 공부했었다-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이 때 나온 작품 중에 주목할 만한 곡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C단조(op.9)인데, 연주 시간이 불과 20분 남짓한 단악장의 콘체르트슈튀크에 가까운 소나타 형식의 곡이다. 하지만 피아노 독주 파트의 화려함과 충실한 관현악 편곡이 범상치 않은 작품인데-개인적으로는 예전에 소개했던 클라라 슈만의 것보다도 더 완성도가 높다고 하고 싶음-, 레셰티츠키 자신은 이 곡에 그렇게 자신이 없었는지 생전에 연주는 커녕 출판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 두었다.
협주곡의 악보가 레셰티츠키의 유품에서 발견되어 미국 리치먼드에서 초연된 것이 1972년이었고, 유럽에서 최초로 연주된 것은 그 뒤로 20년 후의 일이었으니 상당히 뒤늦게 발굴된 셈이다. 하지만 이 협주곡은 단순히 '19세기 명 피아니스트' 정도로 인식되었던 레셰티츠키를 현대에 부활시키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 초연이 있었던 1992년, 초연지였던 바트 이슐-Bad Ischl. 온천으로 유명한 여름 휴양지로, 레셰티츠키 외에도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등이 별장을 두고 있었다-에서 레셰티츠키 협회가 발족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의 후원으로 '레셰티츠키 국제 여름 피아노 아카데미' 가 매년 열리고 있는 것이다.
레셰티츠키는 제히터에게 배운 뒤 계속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 여행을 하는 한편, 피아노곡을 위주로 작곡 활동도 계속 했다. 작품 중에는 오페라도 두 곡 있는데, 1852년 완성된 '마르코의 형제들' 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의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초연 직후 레셰티츠키는 그대로 눌러 앉아 연주 활동을 계속 했고, 10년 뒤인 1862년에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추천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로 부임하기도 했다.
레셰티츠키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오페라인 '첫 주름(Die erste Falte)' 도 페테르부르크 시절의 작품인데, 1867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고 1882년의 만하임 공연에서는 리스트의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이 곡도 지금은 다른 레셰티츠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잊혀져 있는데, 서곡만이 아주 가끔 연주될 뿐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하던 주페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희극인데, 서곡도 마찬가지 분위기다.
원체 알려져 있지 않았던 만큼 음반도 찾아보기 무척 힘든 것이 레셰티츠키의 작품이다. 내가 아는 한 위의 두 곡이 실려 있는 음반은 마르코 폴로 레이블로 나온 것 뿐인데, 그나마 국내에 수입도 되어 있지 않다. 벨기에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페터 리첸(Peter Ritzen)이 차오 펑 지휘의 상하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것인데, 웬만해서는 서양음악 녹음에 중국 관현악단을 쓰지 않는 낙소스의 방침에서 좀 벗어난 악단 기용이 특이했다.
알고 보니 리첸이라는 사람이 중국 전통음악을 소재로 여러 편의 작품을 쓴 바 있어서, 자작곡으로 마르코 폴로에 두 장의 앨범을 냈을 때도 같은 악단과 협연했었다. 아마 이 앨범도 리첸의 의도대로 녹음된 듯 한데, 예상 외로 꽤 잘 연주된 것 같다. 전형적인 '빈 풍' 인 '첫 주름' 서곡도 원산지 본위의 시각만 갖지 않는다면 듣기에 부담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