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까지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음악 시간-물론 요즘에는 대폭 축소되었다고들 하지만-에 음악의 3요소를 배울 때 '선율(멜로디), 장단(리듬), 화음(하모니)' 이라고 외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전공자로서 배우고 있는 지금은 저것 보다도 더 확대되거나, 아니면 저 3요소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음악들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드뷔시 이래로 음악에서는 '음색' 이 또 중요한 요소로 첨가되었고, 2차대전 후 급진적인 작곡가들이 비서구 음악의 요소를 도입하면서 위의 3요소 자체를 위협하는 새로운 음악까지 만들었으므로 저 (지극히 보수적이고 서양 편향적인) 개념을 언급하는 것도 유치하게까지 보이는 시점이다.
'저 고리타분한 3요소 따위는 집어치우고, 음악을 음향 자체로 즐길 수는 없을까?' 라고 자문할 때 꼭 떠오르는 작곡가가 있으니, 바로 헝가리 출신의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다.
드라큘라 전설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나, 1949년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졸업하고, 1956년에 헝가리 의거가 소련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자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여생을 보낸 작곡가인데, 2차대전 후의 유럽 음악을 언급할 때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현재 독일에서 활동 중인 작곡가 진은숙도 리게티에게 배운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이 영화였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슈트라 팡파르 와 함께 우주 여행의 소리그림을 장식한 것이 리게티의 합창곡 '레퀴엠' 이었다. 큐브릭은 그 후에도 '샤이닝' 과 '아이즈 와이드 셧' 에서 계속 리게티의 작품을 사용했다.
헝가리에 머물고 있을 동안에는 주로 대선배 버르토크나 코다이 등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인-여기서는 '현대적인' 보다 좀 온건한 개념으로 씀-작품들을 썼는데, 목관 5중주를 위한 '여섯 개의 바가텔' 같은 작품은 신 빈악파-쇤베르크+베르크+베베른-의 초기 작품처럼 듣기 그리 어렵지 않은 초기의 대표작이다. 그나마 이렇게 평이한 어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공산화된 헝가리 정부는 그의 작품 거의 대부분을 연주 금지 목록에 올려 버렸다.
하지만 헝가리를 떠난 뒤의 리게티는 그러한 초기 작풍이 무색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개성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58년에는 전자음악에 처음 도전했고, 1961년에는 다름슈타트와 함께 독일에서 유명한 현대음악제가 열리는 도나우에싱엔에서 관현악곡인 '분위기' 를 초연했다. 특히 이 '분위기' 는-현대음악으로서는 매우 드물게-초연 직후 앵콜될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분위기(원제는 프랑스어로 Atmosphères)' 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위의 '3요소' 라는 개념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관현악의 모든 악기가-심지어 스트링의 각 주자들까지도-다른 음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고, 후반에 등장하는 피아노는 건반이 아닌 속의 강철 현을 솔로 문질러서 연주하라고 지시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는 온통 부딪히고 겹치고 뒤엉켜서 거의 소음에 가깝게 흘러간다. 음이 완전히 뭉쳐서 움직이는 이 기법을 '구구 크러스터톤 클러스터(tone cluster)' 라고 하며, 이후 펜데레츠키나 윤이상 등도 응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미국에서 이미 몇십 년 전에 선보여진 적이 있지만-이 시리즈의 '아이브스' 편 참조-, 아직 유럽에는 전해지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 곡이 단순히 '음뭉치 장난' 이 아닌 것은, 곡 자체가 어느 정도의 논리성을 지니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스트링과 목관의 모든 주자들이 저마다 다른 음을 희미하게 연주하면서 시작한 곡이 목관과 금관으로 주도권을 넘기면서 라디오 볼륨을 높이듯이 음량을 키워나가고, 타악기가 추가로 더해지면서 첫 클라이맥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되는 클라이맥스는 모난 데가 없고 그야말로 '두루뭉실한' 느낌이다.
리게티 자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과거에 중시되었던 멜로디적이고 화성적이며 리듬적인 개별성은 중성화되어 돌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크고 작은 앙상블로서 정지된 음향덩어리 안에 녹아 있습니다."
즉, 물에 타서 먹는 비타민제처럼 각각의 요소들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하나의 덩어리 속에 융합시켜 눈에 띄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분위기' 의 한 파트를 떼어 연주해 보면 분명히 '3요소' 에 해당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화음 빼고-. 하지만 이것들은 관현악으로 연주되면서 음뭉치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음뭉치는 귀에 거슬리기는 커녕 하나의 신비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리게티는 자신의 이러한 기법을 '톤 클러스터' 대신 '블록 사운드'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곡을 듣기 전에 '아름다운 선율', '장려한 화음', '흥겨운 리듬' 따위의 기존 선입견은 몽땅 버리는 편이 좋다. 커다란 음향 덩어리들이 꾸물꾸물거리며 움직이는 모습 자체를 감상할 수 있다면, 이 곡을 충분히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후기 '신 빈악파' 의 음악에 잔뜩 질려 있던 나도 이 곡은 처음 듣자 마자 좋아하게 되었다.)
이 곡이 일으킨 센세이션은, 초연된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 필을 지휘해 레코드(CBS/소니 클래시컬)를 만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징하게 보수적인 관현악단으로 소문나 있는 빈 필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로 1988년에 실황녹음(도이체 그라모폰)했고, 최근에는 조나단 노트의 지휘로 베를린 필이 음반을 출시했다. 이것으로 세계 3대 관현악단이 모두 음반을 낸 셈이다.
노트와 베를린 필의 연주는 텔덱에서 나온 '리게티 프로젝트' 라는 시리즈 중 하나인데, 이 곡 외에도 '환영(Apparitions, 1958-59)', '론타노(Lontano, 1967)', '샌프란시스코 폴리포니(San Francisco Polyphony, 1973-74)', '루마니아 협주곡(Concert românesc, 1951)' 같은 다른 관현악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다. 이 곡을 처음 들었던 아바도와 빈 필의 음반은 '빈 모데른(Wien Modern)' 이라는 타이틀로 나와 있고, 리게티의 곡으로는 이 곡과 '론타노' 가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 볼프강 림, 피에르 불레즈, 루이지 노노의 작품이 담겨 있음) 리게티 작품만을 노리는 사람에게는 전자가, 다른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도 듣고 싶다면 후자가 적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