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건지, 아니면 너무 소심한 건지는 모르지만 장년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작품들을 만들었고, 그 작품들 마저도 말년까지 붙들고 늘어진 작곡가가 바로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다. 그의 개정벽은 악명이 자자해서, 교향곡 한 곡당 평균 서너 개의 판본들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다. 이들 판본은 몇몇 호사가들이 '편집광, 새가슴, 로리콘' 으로 묘사하는 브루크너 특유의 2중 인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물론 작곡해 놓고 별로 고치지 않은 작품들도 있는데, 생전에 제대로 된 연주를 듣지 못했던 교향곡 5-6번과 미완성인 9번의 경우에는 개정을 한 번밖에 하지 않았거나, 아예 하지 않은 드문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각각 스승과 지휘자로부터 퇴짜를 맞아 서랍 속에 숨겨두었던 교향곡 00번과 0번도 마찬가지다.
00번 교향곡은 브루크너가 자기보다 열 살 가량 어린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마지막으로 작곡을 배우던 때의 작품인데, 그 때가 1863년. 즉 브루크너의 나이가 39세였던 때였다. 말년에 딱 한 곡만 쓴 세자르 프랑크 같은 드문 예를 제외하면, 교향곡 작곡가로서 엄청나게 늦은 출발인 셈이다. 게다가 키츨러로부터 '별로 인상적이지는 않음' 이라는 싱거운 평가를 받았고, 모처럼 대곡에 도전했던 브루크너는 생전에 이 작품을 초연시키지도 못하고 방치해 두었다.
물론 키츨러는 '아직 선대 작곡가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드러낸' 이 습작에서 한 군데 개성적인 대목을 찾아냈다. 바로 3악장 스케르초였는데, 10대 시절부터 가난한 집안의 살림에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술집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익힌 고지 오스트리아의 민속 춤곡이 브루크너식의 독특한 스케르초로 처음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악장들에서는 너무 고전 형식의 틀을 고수하는 것에 치중했고-브루크너 교향곡 중 유일하게 1악장과 4악장의 제시부가 반복됨-, 또 키츨러의 지적처럼 멘델스존과 슈만을 비롯한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이 노골적으로 나타난 까닭에 일종의 '아류작' 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이 곡을 냉정하게 따져 보자면, '아류작' 이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곡 자체로 봤을 때는 꽤 높은 수준의 것이라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내용의 빈약함은 피할 수 없는 비판이지만, 이 때 확실히 적립해 놓은 정통 교향곡 형식 덕분에 그가 미완성 9번에 이르는 교향곡 여정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고, 그 첫 술을 뜨지 않는 이상 밥그릇을 비울 수도 없는 것이다. 베토벤의 첫 번째 교향곡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냄새가 난다고 함부로 '모작' 이라 평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편찬한 작곡가별 명곡해설집의 브루크너 편에서 이 곡을 마지막 9번과 함께 길게 소개한 것은, 이 곡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00번 전곡이 프란츠 모이슬의 지휘로 베를린 필에 의해 초연된 것은 브루크너 사후 30년 가까이인 1925년이었고, 전곡의 악보가 출판된 것은 그보다도 훨씬 뒤인 1973년이었다. 이러한 까닭도 있고, '어설픈 습작' 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이 곡을 지휘한 지휘자는 대단히 적다. '1-9번 전집' 을 남긴 오이겐 요훔과 귄터 반트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0번을 전집에 포함시켰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아사히나 다카시 등도 이 곡을 지휘하지 않았다.
이 곡까지 포함시킨 최초의 진정한 '전집' 은 엘리아후 인발의 것이고(1991), 그 뒤로는 게오르크 틴트너(1998)와 스타니스와프 스크로바체프스키(2001)가 있다. 이 세 사람 외에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거론되며, 2004년 현재까지 모두 일곱 명의 지휘자가 이 곡을 녹음으로 남겨 놓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음반은 틴트너의 것으로, 그의 낙소스 전집 중 가장 마지막에 녹음한 것이다. 비록 오케스트라가 좀 거친 것이 약점이기는 해도, 오스트리아 전통의 계승자이자 꼼꼼한 악보 연구의 결과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몇몇 지휘자들처럼 초기의 이 작품을 후기의 '오르간 발상' 이나 '종교성' 으로 해석하는 과오를 범하지도 않았고, 약점으로 지적되는 여러 대목들을 풀어나가는 솜씨도 능수능란하다. 또 앨범 여백에는 교향곡 4번의 4악장 개정판(1878) '민중의 축제(Volksfest)' 까지 들어 있어, 골수 브루크네리안들에게 좋은 선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