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요절한 아티스트들은 그 파란만장한 생애 때문인지 언론과 소설 등의 입심에 의해 순식간에 유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 중에는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처럼 지금까지 내려오는 명성을 누리는 인물들도 많지만, 세상 일이 모조리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직 발전 가능성이 있는데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들의 경우가 특히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데, 설령 그들의 작품이 다시 발굴된다 하더라도 요절한 아티스트들에 대한 찬사와 함께 모종의 '아쉬움' 이 항상 평가에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작곡가인 바실리 칼린니코프(Vassily Kalinnikov, 1866-1901)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이번 애청곡선은, 작년 11월 14일 전주에서 있었던 전주시향 정기연주회 때 직접 써서 시향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던-사실 낙소스 CD에 있던 키스 앤더슨의 영어 해설을 대충 번역한 것임-것이 공연 프로그램과 KBS 1FM의 중계 방송에 반영되었으므로, 대부분 거기서 땜빵함. (사실 새로 쓰기 귀찮아서)
칼린니코프는 보이나(Voina)에서 경찰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합창단에 들어가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884년에는 모스크바의 필하모닉 협회 학교에 등록해 알렉산드르 일린스키와 파벨 블라람베르크 등에게 바순과 작곡을 배웠다.
그러나 워낙 집안이 가난했던 관계로 정식 음악원 진학은 불가능했고, 각지의 관현악단들을 전전하며 바순, 타악기, 바이올린을 연주해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이 기간동안 칼린니코프는 건강을 많이 해쳤지만, 크루글리코프라는 사람으로부터 무상으로 레슨을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92년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말리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 이탈리아 극장의 지휘자로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직책은 불과 수 개월 후 결핵으로 쓰러지면서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칼린니코프는 얄타로 옮겨 요양을 시작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고 결국 1901년 3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칼린니코프는 생애 말기에 라흐마니노프의 도움으로 얼마 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요양 중 작곡된 교향곡 두 곡과 극음악 '보리스 황제' 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정식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대한 금전적인 댓가는 칼린니코프 사후에야 제대로 보상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러시아 밖에서 듣기 힘들게 되었다. 다행히 20세기 들어 스베틀라노프 등의 지휘자들이 교향곡을 비롯한 작품들을 음반으로 내놓아, 뒤늦게나마 빛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교향곡 제 1번은 1894-95년에 요양지였던 얄타에서 작곡되었으며, 초연은 1897년 키에프-현 우크라이나 수도-의 러시아 음악협회 연주회에서 비노그라드스키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곡은 칼린니코프를 여러 방면에서 도와준 지인 크루글리코프에게 헌정되었고, 라흐마니노프 등의 노력으로 모스크바, 빈, 베를린 등지에서도 연주되었다.
*여기서부터 오리지랄 (←오타???)
칼린니코프가 짧은 생애를 살던 동안 러시아에서는 점차 '러시아 특유의 교향곡' 이라는 것이 정립되고 있었다. 작곡을 시작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차이코프스키는 이미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유명한 케이스고, 그에 필적할 만한 두 번째 교향곡을 쓴 보로딘도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또 (그들보다는 덜 성공적이고 그 때만 주목받았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발라키레프, 글라주노프의 교향곡도 나름대로 서구 형식과 민족 요소의 퓨전을 시도한 증거물로 남아 있다.
'러시아 특유의 교향곡' 이라는 말은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 그리고 최근의 파블로바나 티슈첸코 등 후배들의 등장 때문에 함부로 적용하기는 좀 어폐가 많지만, 대체로 형식 보다는 내용, 이성 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다-물론 글라주노프 같은 독특한 학구파는 예외로 친다고 해도-. 많은 '이지적인' 사람들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싫어한다는 사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칼린니코프의 교향곡이라는 경우에도 차이코프스키 초기의 교향곡 또는 보로딘의 작풍과 비교적 흡사한데, 특히 1악장에서 첼로를 필두로 연주되는 두 번째 주제는 민요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다. 2악장의 메인 테마는 러시아 로망스를 생각나게 하고, 3악장 스케르초는 민속 춤곡의 스텝이 절로 나올 만큼 활달하다.
이러한 강한 민족성은 전곡에 걸쳐 이 곡이 '러시아산' 임을 굳세게 주장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더욱 다채롭게 색칠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슈만의 경우도 비슷한데, 젊음의 패기로 쓴 초기작들이 후기의 작품 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칼린니코프는 그나마 슈만 만큼 오래 살지도 (그리고 건강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자기 계발에 필요한 시간도 상당히 많이 빼앗긴 셈이다.
하지만 칼린니코프의 교향곡이 슈만의 것들처럼 관현악 처리에 있어서 약점을 보이기는 해도, 형식에 관해서는 오히려 고전적이고 절도가 있게 처리되어 있다. 1악장은 아주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의 코스를 밟고 있고, 4악장에서는 1악장 서주의 인트로를 짧게 인용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2악장의 서정적인 선율을 금관이 강하게 연주하는 등의 방식으로 전곡을 묶어 나가고 있다-이러한 방식은 브루크너도 5번 교향곡에서 쓴 바 있다-.
이렇게 독일식 구성미와 러시아식 요소의 퓨전이 (불완전하기는 해도) 시도되었다는 것에 착안했는지, 독일 지휘자인 헤르만 아벤트로트는 스베틀라노프 등 러시아 지휘자들보다도 앞서서 라이프치히 방송 교향악단-현재는 중부 독일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이 곡을 녹음했다. 물론 정식 스튜디오 녹음이 아니라서 소리의 질은 좀 떨어지지만, 이미 테이프가 방송국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1949.11.16)의 것이므로 심하게 나쁜 소리는 아니다.
2차대전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의 러시아 연주 여행을 했고, 2차대전이 끝난 지 몇 달 뒤 라이프치히에서 가진 연주회에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지휘한 사례도 있듯이, 아벤트로트는 (푸르트벵글러 보다도) 러시아 음악에 대한 친화력이 강한 지휘자였다. 물론 아벤트로트가 전후 소련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동독에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러시아 음악이 프로그램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벤트로트가 이 곡을 순전히 그러한 '외압' 때문에 택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벤트로트의 해석은 많은 음들에 테누토(늘여서)를 걸고 트럼펫 등의 금관에 폭넓은 바이브레이션을 주는 등의 '전통적인 러시아풍' 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주로 템포의 유동에서 추진력을 얻고 있다. 1악장이 좋은 예로, 예의 서정적인 제 2주제가 나올 때에는 악보에도 없는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를 걸어서 속도를 떨어뜨려 충분히 노래할 수 있게 시간을 버는 것을 들 수 있다.
2악장에서도 일반적인 멜랑콜리 보다는 브람스 풍으로 더 내성적이고 무뚝뚝한 진행인데, 마치 지휘자와 악단의 '독일식 감정 표현'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4악장에서는 푸르트벵글러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의 4악장 녹음에서 그랬듯이, 속력을 빠르게 잡고 돌진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올드 타입이라 조미료를 많이 넣은 느낌은 있어도, 음반 속지를 참고했던 낙소스의 CD 보다는 훨씬 그 맛이 강렬했다.
이 곡은 전주에서 연주되기 이전에도 이미 서울에서 서울 필하모닉의 연주로 국내 초연이 된 바 있고, '객석' 등에서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예의 스베틀라노프 음반-킹레코드의 NHK 교향악단 실황 시리즈-도 수입되는 등 리바이벌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시점이다. 아벤트로트나 스베틀라노프처럼 곡의 부족함을 메꾸어 줄 지휘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연주되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