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자신의 작품에 꼼꼼히 작품 번호(opus)를 달던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브람스의 작품 목록에도 작품 번호를 달지 않고 출판된 작품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작품들 중 브람스의 엄격한 자기 평가를 받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것들은 브람스 사후에 출판되었고, 생전에는 '독일 민요집' 과 '헝가리 춤곡집' 이 작품 번호 없이 출판되었다.
생전의 두 작품집은 브람스가 '편곡' 했다는 이유로 작품 번호를 붙이지 않은 것인데, 후자의 경우에는 '표절 혐의' 로 말썽이 생겨서 유명하다. 브람스의 오랜 친구였던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가 '브람스가 내 악상을 무단 도용해 자기 작품으로 출판했다' 라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걸었던 것인데, 법원 측은 브람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브람스와 레메니의 우정은 깨지고 말았다.
헝가리 춤곡집은 모두 21곡으로 되어 있는데, 레메니의 소송이 문제가 되었던 곡들은 1번부터 10번 까지의 곡들로 1집에 묶여 출판된 것이었다. 2집에 해당하는 곡들은 11-21번인데, 비록 법정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어도 여전히 그 후환을 두려워 했는지 이번에는 직접 헝가리 민속 선율을 차용하는 일이 드물었고, 최대한 자신이 창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집의 곡들은 1집에 비해 브람스의 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반면, 상대적으로 민족성이 흐려졌다는 평가가 많다.
헝가리 춤곡집은 주로 집시들의 민속 음악에서 쓰였거나, 그 영향을 받은 음악 요소들이 많이 차용되어 있다. 당시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함께 유럽에서 '근절 대상 1호' 의 자리를 다툴 정도로 멸시받던 민족이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왕가가 합쳐진 '2중 왕국' 의 형태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집시들에 대한 대우가 훨씬 관대했다. 빈에서 일생을 보낸 브람스가 이들의 음악을 지나칠 수는 없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이 곡집이다.
하지만 저 곡집은 그 위치 때문에 오늘날 평가절하 되는 경우가 많다. 집시 음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서구 음악의 요소와 브람스 자신의 개성이 가미되어 '이도 저도 아닌 무드 음악' 류가 되었다는 종족음악학 계열의 비판이 특히 강세다. 브람스가 '편곡했을 뿐' 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오늘날도 헝가리 춤곡집이 브람스의 '작품' 으로서 소개되는 것도 그것을 반증한다.
(쇼스타코비치도 빈센트 유만의 뮤지컬 넘버 '둘이서 차를' 이라는 곡을 편곡한 것이 '타히티 트롯' 이라는 소품으로 당당히 작품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단순한 편곡이라도 작곡가의 입김이 많이 가해지면 '작품' 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서구 사회의 통념인 것 같다.)
헝가리 춤곡집의 원래 편성은 피아노 연탄이었고, 1집은 피아노 독주용으로도 출판되어 있다. 브람스는 이 곡집 중에서 1번과 3번, 10번을 관현악용으로 편곡했는데, 나머지 곡들은 다른 작곡가들이 편곡을 완성해 21곡 모두 관현악판이 존재한다. 17-21번은 브람스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던 안토닌 드보르작이 관현악 편곡을 맡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헝가리 춤곡집' 과 좋은 짝을 이루는 '슬라브 춤곡집' 을 작곡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나머지 곡들의 관현악 편곡자들은 스웨덴의 요한 안드레아스 할렌(2번), 스위스의 파울 유온(4번), 독일의 마르틴 슈멜링(5-7번), 오스트리아의 한스 갈(8-9번), 영국의 앨버트 팔로우(11-16번)가 있다. 오늘날 연주/녹음되는 헝가리 춤곡집의 관현악 버전은 이들의 것을 묶은 것이 대부분인데, 헝가리의 지휘자 이반 피셔는 이들의 편곡을 직접 수정하고 심발롬(양금과 비슷한 민속 타현악기)과 집시 바이올린 등을 추가해 더욱 민족색을 보강하고 있다.
곡집에서 가장 유명한 곡들은 브람스의 관현악 편곡인 1, 3, 10번 외에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 에도 쓰였던 5번이 있다. 이 곡들은 국내 관현악단들의 연주회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이며, 모두 가장 헝가리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1집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물론 저 곡들 외에 상대적으로 평가를 덜 받는 2집이라도 주목할 만한 곡들은 많다. 하지만 피아노 연탄/독주용이건 관현악용이건 헝가리 춤곡집이 몇 곡 발췌로 연주되는 일은 있어도, 전곡이 연주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 고른 가치 평가에 걸림돌이 되곤 한다.
개인적으로 위의 '유명한 곡들' 외에 좋아하는 곡은 7, 9, 11, 15, 16번인데, 7번과 15번, 16번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플랫 계열 조성이며 9번과 11번은 단조의 곡이다. 또 장조 곡이라고 해도 16번의 첫머리는 단조다. 특히 16번의 경우에는 통상 세도막 형식이 아니라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처럼 느린 랏산과 빠른 프리스카가 연달아 나오는 두도막 형식의 응용이라서 주목된다.
7번과 15번은 중간부의 열정적인 단조 부분을 빼면 집시색이 상당히 옅고, 오히려 독일 민요 풍의 따뜻한 느낌인 곡인데, 그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대조적으로 9번과 11번은 전곡에 집시 음악풍의 애수와 흥취가 묻어나와 있다. 특히 11번의 첫머리는 너무 슬프지도 어둡지도 않은 야릇한 악상으로 되어 있어서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가 난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취향에도, 그리고 일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는 '헝가리 춤곡집' 을 듣고자 한다면 발췌가 아닌 전곡을 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그 전곡이 클라우디오 아바도같이 민족색 보다는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취향을 내세웠건, 아니면 이반 피셔처럼 민족색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건 간에 모든 곡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는 곡집인 것이다.
이 곡집이 '헝가리-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의 이종 교배' 라는 비판을 받고 있더라도, 음악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은 '민족성' 의 논쟁을 떠나 이 곡집 자체가 가진 매력까지 버림받지는 않고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또 이 곡은 정통 헝가리/집시 음악을 듣기 전의 애피타이저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