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별로 따져 봤을 때 지금껏 친숙해지지 못한 클래식 분야가 있다면, 아마 영국과 이탈리아 쪽일 것이다. 영국이야 20세기에 들어서 겨우 부활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전통적인 노래 강국' 인 이탈리아는 아직도 미답의 경지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는 내게 '음악을 스포츠화 시켜버렸다' 고 해서 미운 털이 박힌 파가니니를 배출한 나라이기도 하며, 너무 가볍게만 들리는 노래들로 인해 음악 풍토 자체에 선입견을 가지게 된 나라이기도 한 것이다. 오페라만 해도 베르디나 푸치니 이전의 것들은 아리아 등을 빼고는 한 번도 전곡을 들어본 적이 없다-물론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는 보기 드문 예외지만.
행여나 마리아 칼라스 같은 대가들의 노래를 듣게 되면 그 선입관이 많이 깨질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내 취향이 지금도 독일/북유럽/러시아 음악에 집중된 탓에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이탈리아에 기악으로 성공한 매우 드문 케이스인 레스피기의 교향시 작품들은 여전히 애청곡으로 남아 있으며, 이번에 소개할 오보에 협주곡도 마찬가지다.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의 카타니아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카타니아에는 '테아트로 마시모 벨리니' 라는 오페라 극장도 건립되어 있다. 고향에서 기초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뒤 남이탈리아의 중심 도시인 나폴리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다른 이탈리아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주목을 받게 된 분야는 오페라였다.
24세 때부터 오페라를 발표하기 시작한 벨리니는 '몽유병의 여인', '노르마' 같이 지금도 자주 공연되는 명작들을 짧은 생애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써냈다. 생애 후반기에는 파리로 이주했고, 거기서 '청교도' 를 작곡/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청교도' 는 벨리니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고, 초연이 이루어진 해인 1835년에 불과 3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벨리니를 '이탈리아의 쇼팽' 이라고 비유한 구절을 어디선가 봤는데, '노르마' 에 나오는 아리아 '정결한 여신(Casta Diva)' 같은 곡을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이탈리아인 답게 노래 선율은 매우 유창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종의 '기품' 까지 느껴진다. 음이 마구 오르락 내리락 하는 소프라노의 콜로라투라 아리아나, 래퍼들이 울고 갈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노래를 구사하는 베이스 부포가 난무하는 로시니의 것보다 훨씬 듣기에 부담이 덜 가는 것이다.
위에 쓴 대로 벨리니의 대표작은 대다수가 오페라지만, 종교음악이나 기악곡도 (각광을 훨씬 적게 받기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오보에 독주와 현악 합주를 위해 작곡한 협주곡의 경우, 소품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소규모에 길이도 짧지만 여전히 오보이스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벨리니가 나폴리에서 배우던 시절의 작품인데, 고전적인 3악장 형식이라고는 해도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 1악장(0:00~0:22)은 그야말로 '인트로' 이며, 2악장(0:22~3:27)과 3악장(3:27~끝)은 느림-빠름의 소프라노 아리아를 곧장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 세 악장을 합쳐 봐도 전체 연주 시간은 고작 7-8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곡의 내용 자체도 '가사 없는 오페라 아리아' 라고 해도 될 만큼 오보에 솔로의 '노래' 에 가장 큰 비중이 주어져 있다. 게다가 학창 시절에 가벼운 마음으로 쓴 작품임에도, 훗날 작곡될 오페라 아리아들에서 나타나는 기품있고 서정적인 선율과 성악 기교가 어색함 없이 구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은 벨리니의 다른 명작 오페라들에 가려서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성악' 이라는 통념 때문인지 근래에 와서야 연주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실정이다. 음반의 경우에도 알비노니, 마르첼로, 비발디 등 바로크 시기의 오보에 협주곡이나 모차르트의 곡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베를린 필의 수석 오보이스트 중 한 사람인 한스외르크 셸렌베르거가 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보에 협주곡과 커플링한 음반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냈는데,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 외에도 현재 세계 오보에의 지존인 하인츠 홀리거가 연주한 필립스 음반도 있다고 하지만, 오래 전(1990)에 나와서 그런지 요즘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앨범은 영국의 세인트 마틴 아카데미 합주단이 위의 셸렌베르거와 마찬가지로 합주단 수석이었던 오보이스트 로저 로드의 독주로 연주/녹음한 데카 음반이다. 비록 느리고 서정적인 2악장에서는 독주자의 비브라토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드러져 '신파' 분위기가 좀 나기는 해도, 곡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