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틀즈 콘체르토 그로소에 이어, 그보다 훨씬 물량으로 압도적이고 필적할 만한 분야가 없는 브라이너의 프로젝트가 바로 '세계 국가 대전집' 이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존속되고 있던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국만 159개국이었고, 그 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이 마구 분열되면서 생긴 나라들도 10여개 국이 될 정도로 나라가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들 나라의 국가(National Anthem)를 녹음하고자 하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이 월드컵이나 올림픽 참가국들 중 몇 개 나라만을 추려서 CD 한 장에 담아낸 것들이었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의 국가를 녹음하고자 하는 사람을 찾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낙소스 산하 희귀 레퍼토리 발매를 전문으로 하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과감하게 이 방대한 계획에 도전했는데, 100여개 나라들의 국가를 편곡/지휘하는 일이 바로 페터 브라이너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알파벳 순으로 시작한 이 세계 국가 대전집은 모두 여섯 장의 CD가 소비될 정도로 방대했으며, 주권이 있는 나라들 뿐 아니라 아카디아, 스코틀랜드, 웨일즈, 카라바흐, 맨섬, 저지/건지섬, 미국령 사모아 같은 자치권이 있는 지방의 준국가들, 유럽 공동체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까지 포함하고 있다.
또 국가 자체가 같은 음악을 가사만 바꾸어 반복하도록 하는 유절 형식임을 고려해, 연주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브라질, 알제리, 미국 등의 국가는 전곡 연주판과 반복구 삭제판 두 가지를 녹음해 놓았다.
물론 이 수많은 국가들 모두가 브라이너의 손을 거쳐간 것은 아니다. 해당 나라의 국가들 중 오케스트라판 악보가 있는 곡은 대체로 그 악보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국가와 일본 국가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 진귀한 세트를 우리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마르코 폴로가 정식으로 수입되던 시기에도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3집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
3집에 바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 국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파벳 순이라는 이유로 북한(DPRK)의 것이 남한(ROK)보다도 위에 실려 있으니, 빨간색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이 음반은 수입이 금지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저 시리즈 자체의 위업은 대단한 것이지만, 많은 국가들 중 그 나라의 민족색이 물씬 풍기는 일본, 인도, 모리타니 등의 국가는 편곡에 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식 음악이론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음악에 3화음을 덧붙이다 보니 어색한 느낌이 드는데, 특히 인도 국가의 끝맺음이 그렇다.
또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국가 대전집 녹음 뒤에도 팔레스타인, 동티모르 등의 나라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아마 이들 국가를 추가해 새로운 CD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지구상 어느 악단에도 선례가 없는 이 '황당무계한' 계획을 추진한 낙소스/페터 브라이너/슬로바키아 방송 교향악단의 용기와 배짱에 박수를.
*각 음반의 번호-1집: 8.223386/2집: 8.223387/3집: 8.223388/4집: 8.223835/5집: 8.223836/6집: 8.223852
**물론 저 국가들이 일단 브라이너의 '2차 편곡물' 이기 때문에, 음원은 공식적으로 낙소스 홈페이지에서 제공되고 있지 않다. 단, 캐나다 국가만은 들을 수 있도록 해 놓았고. 다른 곡들도 음원을 빼내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엄연한 불법 행위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