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는 가시밭길을 걷기 마련' 이라는 격언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동식물을 짜맞추어 인물화를 그리다가 '저속하고 괴기스러운 취미의 화가' 라고 낙인찍혔던 주세페 아르침볼도, '북회귀선' 으로 유럽 사회에서 '성 표현의 한계' 를 깨어버린 소설가 헨리 밀러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1954)의 경우에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되는데, 쇤베르크 등에 의해 창안된 '12음기법' 을 제외한 거의 모든 현대음악기법들을 미리부터 보여주었던 것이다. 아이브스가 미국 땅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토박이였고, 그가 알고 있던 유럽 작품들도 후기 낭만파에 국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놀랍다.
이러한 성향을 심어준 것이 바로 아버지 조지 아이브스였는데, 고향인 코네티컷주 댄버리의 밴드 마스터로 항상 실험적인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조지는 아들 찰스에게 일반적인 음악 이론 외에도 복조(polytonality)-예컨대 Bb장조로 반주를 하면 그 위에 G장조로 노래를 하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음 체계를 12반음보다 더 잘게 나눈 미분음,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이 아닌 팔뚝으로 눌러서 나오는 음향에서 착안된 '음뭉치(tone cluster)' 를 어렸을 적부터 가르친 것이었다.
조지가 아들에게 저런 것을 가르쳐준 시기는 유럽에서 저러한 사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몇십 년 전의 일이었다. 아이브스는 이렇게 특이한 유년 시절을 보낸 뒤 예일대학교에 들어갔고, 그 곳의 음악 교수였던 호레이쇼 파커에게 유럽의 고전 음악과 기법을 배웠다.
하지만 파커와 아이브스의 수업은 서로의 음악관 차이로 그리 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파커의 보수 성향과 위의 여러 현대 기법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한 아이브스의 의도는 물과 기름이었다.
어쨌던 아이브스는 1898년 예일대를 졸업하고 나서 뉴욕에서 보험 사업을 시작했고, 1907년에는 독자적인 보험 회사를 설립했다. 아이브스는 이 기간 동안 사업에 주력하기는 했지만, 작곡 활동에도 마찬가지의 시간을 쏟았기 때문에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
결국 아이브스가 실질적으로 작곡 활동을 한 것은 1917년까지였고, 그 뒤로는 예전 작품의 개정과 출판 등을 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보험 사업에서 은퇴하고 부유한 농장주가 되었다. 이미 재정적으로는 풍요로운 상태였지만,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터라 작곡을 계속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이브스가 쓴 대다수의 작품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위의 기법 때문에 '장난삼아 쓴 것' 으로 자주 오인받았으며, 실제로 1947년에 교향곡 제 3번 '캠프 모임' 이 퓰리처상을 받기 전까지는 작곡가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아이브스의 업적과 명성이 확실히 굳어진 것은 그가 죽고도 10년 정도가 지난 1960년대에 와서였다.
아이브스가 파커에게 배우던 때까지는 비교적 유럽 전통과 기법에 충실한 작품을 썼다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당시 '대중적인 음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미국의 민요들이나 찬송가 선율이 자주 패러디되어 나타나고 있고, 때로는 코드 진행의 대담함까지도 엿볼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점이 파커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교향곡 제 2번은 대학 재학중에 착상되기 시작했고, 주로 작곡된 것은 1900-02년의 3년 동안이었으며, 최종 완성은 1909년에 이루어졌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쳤고, 결국 작곡된지 몇십 년이 지난 1951년에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 필 연주로 가까스로 초연을 보게 되었다.
저 교향곡에서 파커가 지도한 것은 중간의 3악장 뿐이고, 나머지는 아이브스의 자유로운 창작에 의했다고 한다. 유럽 전통으로 볼 때 이 곡은 '교향곡' 이라는 장르의 틀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평가되는데, 전체적인 구조 마저도 무시한 채 미국 전통 음악 요소들을 마구 '때려 박은', 미술 용어를 빌리자면 '콜라주 기법' 을 작품에 본격적으로 응용했기 때문이었다.
교회 등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저 곡에서 찬송가의 곡조를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이고, 포스터의 가곡이나 '아름다운 아메리카' 같은 노래의 단편이 마구잡이로 쓰여진 것에 경악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콜라주 기법의 완성은 후기 작품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지만, 나는 차라리 말기의 그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복잡함 보다는 이러한 절충적인 양식이 마음에 든다.
실제로 아이브스의 작품은 이 시기를 넘어가면 '너무 심오하거나', 혹은 '너무 어이없거나' 하는 두 가지 반응을 받기 마련이고, 아이브스가 저런 극단적인 경지에 이르기 전에 전통적인 수업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마련이다. 아이브스의 작품을 작곡 연대에 따라 순차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향곡에 대해 초연을 맡았던 번스타인은 '미국의 음악 요소를 유럽의 교향악 국솥에 넣어 요리한 미국식 교향곡 1호' 라고 평했는데, 주의해야 할 점은 아이브스가 '미국식 국민악파' 작곡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이브스의 개성은 미국의 음악 요소건 유럽의 전통 요소건 간에 모두 자기 식으로 가공한 뒤, 진보적인 기법을 양념처럼 뿌려서 만든 것에 있다.
곡은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악장과 4악장은 모두 후속 악장들의 인트로 정도이며 같은 소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3부 구성' 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작곡 후에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까닭에, 곳곳에서 후기 아이브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특히 5악장의 마지막 화음은 아마 '절정감' 보다는 '괴리감' 을 안겨줄 지도 모르겠다.
이 교향곡을 초연한 번스타인/뉴욕 필 콤비는 CBS(현 소니 클래시컬)와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을 한 바 있는데, 후자는 1987년 실황 녹음이다. 초연을 맡은 음악가들이었던 만큼 곡의 해석 등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데, 1987년 녹음은 전자인 CBS 녹음에 비해 깊이있는 면모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특히 3악장의 연주는 번스타인 말년의 감정적인 해석과 더불어 대단히 감동적이며, 실황 녹음이라 합주력이 종종 무너지는 단점은 있어도 그 열기가 보완해 주므로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 앨범 여백에는 아이브스가 작곡한 여러 관현악 소품들이 들어 있는데, 위에 쓴 대로 '너무 심오하거나' 혹은 '너무 어이없거나' 하는 면모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