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네케(Carl Reinecke. 1824-1910)는 독일의 작곡가/지휘자/피아니스트로, 주로 라이프치히 등 독일 동부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80세를 넘긴 만큼 작품도 많고, 작품 번호(opus/op.)가 붙은 것만 200곡도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장수 작곡가' 들이 그렇듯, 라이네케의 이름을 오늘날 연주회 곡목이나 음반에서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다. 단지 플루트 전공자나 하프 전공자들이 그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있을 뿐이며, 희귀 레퍼토리의 발매를 전문으로 하는 낙소스의 CD 몇 장이 관현악 부문을 보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프' 라는 악기는 일반적으로 여성적인 악기라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그 환상적인 아르페지오(펼침화음)가 빚어내는 소리와 달리, 수십 개의 현을 퉁겨야 하는 손가락은 어느 악기보다도 더 혹사해야 하며, 임시표가 많이 붙은 곡일 수록 발도 이리저리 움직여 페달을 바꾸어야 음정 조절이 가능한 악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프 곡들은 악기의 여성성을 반영한 듯, 매우 단아하고 깔끔한 곡들이 대부분이다. 모차르트의 유명한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라이네케는 하프 협주곡을 단 한 곡(op.182) 남겼는데, 그가 재직하고 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수석 하피스트인 에드문트 셰커를 위해 작곡했고 1884년에 초연이 이루어졌다.
E단조라는 조성에서 보듯, 하프 곡으로서는 비교적 드문 단조의 어두움이 1악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곡 자체도 '하프=여성적' 이라는 통념을 깨버릴 정도로 단호한 악상이 지배적인데, 관현악 인트로 뒤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프 독주는 마치 일장 연설을 하는 것 같이 대범하다.
라이네케는 위의 모차르트 곡에 카덴차를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곡의 1악장 후반부에 나오는 상당히 인상적인 카덴차도 직접 작곡했다. 이 카덴차도 매우 선이 굵고 화려해 독주자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작곡되었다.
물론 이렇게 강성으로 나가는 1악장 다음에는 하프가 반주 역으로 전환해 호른의 가곡 풍 선율에 부드러운 화음을 넣어주면서 시작하는 서정적인 2악장이 있다. 이 2악장은 마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북구의 서정성이 배어 있어, 이 곡이 왜 연주가 뜸한지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다.
3악장에서는 관현악에 트라이앵글이 첨가되고, 트럼펫의 팡파르 등이 더해져 다시 스케일이 큰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끝은 E단조에서 E장조로 조옮김이 되어 '해피 엔딩' 으로 끝나는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멋진 협주곡을 발굴해낸 한 사람으로 에스파냐 출신의 남성(!) 하피스트인 니카노르 사발레타(Nicanor Zabaleta)가 있는데, 그는 이 곡을 1962년에 에른스트 메르첸도르퍼(Ernst Märzendorfer) 지휘의 베를린 필과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해 양지로 끌어냈다.
저 음반은 LP 시대에도 인기가 있었고, 나도 성음 라이센스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LP의 스크래치 노이즈가 신경쓰여 많이 듣지 못했고, 출반 당시 커플링된 모차르트와 달리 20세기가 지나도록 CD화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에 드디어 도이체 그라모폰이 'The Originals' 의 기획으로 모차르트의 협주곡, 그리고 그 이전 녹음(1959)인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의 '협주 세레나데' 와 함께 CD(463 648-2)로 내놓았다. 최신의 CD인 만큼 음질도 매우 좋고, LP에서는 불분명했던 pp(피아니시모) 부분도 뚜렷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2001 Deutsche Grammophon GmbH
하프의 여성적인 이미지가 식상해 진다면, 라이네케의 협주곡을 들으면서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작년에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정기연주회 때 이 곡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무슨 사정인지 평범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바뀌어 버려 아쉬움을 남긴 적도 있었다. 언젠가 공연 무대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