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빌려온 책들 중 아웃사이더인지 인사이더인지 어쨌던 크라잉 넛에 관한 책이 있었다. 사실 책 자체는 크라잉 넛의 인터뷰 빼고는 그다지 감명 깊었던 내용이 없었고, 오히려 그 동안 근 반 년도 넘게 안듣고 있던 테이프들을 듣게 만들었다.
대략 12시 넘어서 그것들을 들었으니 다른 가족들은 물론 좆치안았겠지만, 그래도 재수생 시절 이들의 공연으로 얻어졌던 (그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었던) 긍정적인 기억들이 새록새록했다.
재수 학원을 수도학원 같은 유명 학원 대신 예체능 전문이라는 홍대 근처에 다녔고, 입소문으로 알게 된 곳이 바로 드럭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음악 생활 중 70% 이상을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었고, 대중음악이래봤자 넥스트라던가 김동률, 유희열 등 '편식주의자' 였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받은 스트레스는 지금에 비할 바 아니었고, 어디에선가는 꼭 풀어야 했다. 그래서 음악이 어떻건 간에 일단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뛰놀 수 있다는 드럭을 찾아갔다.
물론 첫인상은..."이게 대체 뭐야?" 였다. 서로 밀고 밀치는 클럽 기둥 오른편의 '슬램 전용 코너' 에 처음 자리잡았던 터라 무슨 폭동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게다가 그놈의 PA며 앰프는 왜 그리도 구닥다리였는지. 정말 '개판' 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자괴감으로 사람 사귀는 것 자체를 기피하던 나였고, 지금도 거기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름값 높던 크라잉 넛, 노 브레인을 비롯해 여러 밴드들의 노래는 들으면 들을 수록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반감이 친화력으로 쉽게 전이되었다. 가사는 뒷골목 혹은 저주받은 삶 그 자체였으면서 노래는 뛰놀기 좋은 정말 아리송한 분위기.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설탕과 식용유를 떡칠한 듯한 아이돌 가수들의 것과는 비할 수 없었다.
다행히 매일매일 땀범벅이 되어 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부모님은 의심하지 않으셨고, 때마침 산 워크맨은 나의 클래식 테이프가 아닌 그러한 밴드들의 테이프를 돌리는데 대부분의 기능을 했다. 물론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이 노래들이 힘든 시기를 같이 해주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하여 대학 새내기 때 자기소개를 괴상하게 하며 불렀던 노래가 '말달리자' 였고,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크라잉 넛과 노 브레인의 노래는 항상 18번에서 떨어지는 적이 없다.
물론 요즘에는 그렇게 뛰놀기에는 체력 문제도 있고, 위의 두 밴드가 각각 군 복무(크라잉 넛)와 드럭 탈퇴+차승우의 탈퇴(노 브레인) 등으로 인해 나의 음악 취향에서는 장외권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잊어버리지는 못한 것이었고.
군대 문제, 돈 문제, 학업 문제 등이 다시금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중에 다시 듣는 드럭밴드 혹은 90년대 인디 밴드의 노래는 요즘의 '거품 빠진 인디 음악계 현실' 과 더불어 '좆타가도 좆치안았던 재수생 시절' 을 다시금 회상케 했다.
(네이버 블로그, 2003.12.4)
대략 12시 넘어서 그것들을 들었으니 다른 가족들은 물론 좆치안았겠지만, 그래도 재수생 시절 이들의 공연으로 얻어졌던 (그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었던) 긍정적인 기억들이 새록새록했다.
재수 학원을 수도학원 같은 유명 학원 대신 예체능 전문이라는 홍대 근처에 다녔고, 입소문으로 알게 된 곳이 바로 드럭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음악 생활 중 70% 이상을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었고, 대중음악이래봤자 넥스트라던가 김동률, 유희열 등 '편식주의자' 였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받은 스트레스는 지금에 비할 바 아니었고, 어디에선가는 꼭 풀어야 했다. 그래서 음악이 어떻건 간에 일단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뛰놀 수 있다는 드럭을 찾아갔다.
물론 첫인상은..."이게 대체 뭐야?" 였다. 서로 밀고 밀치는 클럽 기둥 오른편의 '슬램 전용 코너' 에 처음 자리잡았던 터라 무슨 폭동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게다가 그놈의 PA며 앰프는 왜 그리도 구닥다리였는지. 정말 '개판' 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자괴감으로 사람 사귀는 것 자체를 기피하던 나였고, 지금도 거기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름값 높던 크라잉 넛, 노 브레인을 비롯해 여러 밴드들의 노래는 들으면 들을 수록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반감이 친화력으로 쉽게 전이되었다. 가사는 뒷골목 혹은 저주받은 삶 그 자체였으면서 노래는 뛰놀기 좋은 정말 아리송한 분위기.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설탕과 식용유를 떡칠한 듯한 아이돌 가수들의 것과는 비할 수 없었다.
다행히 매일매일 땀범벅이 되어 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부모님은 의심하지 않으셨고, 때마침 산 워크맨은 나의 클래식 테이프가 아닌 그러한 밴드들의 테이프를 돌리는데 대부분의 기능을 했다. 물론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이 노래들이 힘든 시기를 같이 해주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하여 대학 새내기 때 자기소개를 괴상하게 하며 불렀던 노래가 '말달리자' 였고,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크라잉 넛과 노 브레인의 노래는 항상 18번에서 떨어지는 적이 없다.
물론 요즘에는 그렇게 뛰놀기에는 체력 문제도 있고, 위의 두 밴드가 각각 군 복무(크라잉 넛)와 드럭 탈퇴+차승우의 탈퇴(노 브레인) 등으로 인해 나의 음악 취향에서는 장외권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잊어버리지는 못한 것이었고.
군대 문제, 돈 문제, 학업 문제 등이 다시금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중에 다시 듣는 드럭밴드 혹은 90년대 인디 밴드의 노래는 요즘의 '거품 빠진 인디 음악계 현실' 과 더불어 '좆타가도 좆치안았던 재수생 시절' 을 다시금 회상케 했다.
(네이버 블로그, 2003.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