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와 관련되어 온라인이던 오프라인이건 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나 음반은 교향곡 쪽에 집중돼 있다. 실제로 그의 교향곡 작품들이 연주 빈도도 꽤 높은 편에 속하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던 만큼 종교음악도 작품 목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은 1930~40년대에 정치적인 이유로 고의적인 개무시를 당해야 했는데, 바로 나치의 입김 때문이었다. 나치는 브루크너를 베토벤과 바그너에 버금가는 독일 음악예술의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시킴과 동시에, 그의 종교성을 거세시켜 히틀러를 비롯한 반종교적인 성향의 나치 고위층 입맛도 맞추려고 했다.
실제로 레겐스부르크 브루크너 음악제의 개회사에서 그 내용을 최초로 공표한 요제프 괴벨스 외에도, 나치 시대에 활동한 페터 라베나 베르너 코르테, 라인홀트 치머만 같은 어용 음악학자들은 브루크너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서 천주교의 영향력이나 흔적을 지우려고 한 거지같은 저작들을 한보따리 남긴 바 있다.
저렇게 나치의 가증스러운 뻘짓도 있었지만, 그의 종교음악은 의외로 연주하기가 까다롭다는 근본적인 어려움도 지니고 있다. 특히 합창 파트의 음역대가 광대하고 무척 긴 호흡을 요하기 때문에, 웬만한 성당의 성가대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의 고난이도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같이 수반되는 관현악도 벽돌을 쌓아올린 듯 견고하고 묵직한 사운드를 내기 때문에, 양자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지휘자의 고민도 만만치 않다.
브루크너는 독실한 교인이기도 했지만 소탈한 야인이기도 했고, 빈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는 린츠 등지에서 아마추어 합창단의 단원이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세속 합창곡도 여러 곡 썼다. 브루크너의 첫 출판작이 세속 남성합창곡인 '게르만인의 행진(1864. 아우구스트 질버슈타인 시)' 인 것도 그런 점에서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닌데, 가장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 또한 세속 남성합창곡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합창곡인 '헬골란트(Helgoland)' 는 게르만인의 행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스케일과 드라마를 그려내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1893년에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남성합창단인 빈 남성합창 협회(Wiener Männergesang-Verein)가 창단 50주년을 맞게 되었는데, 이 합창단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이 합창단의 지휘자는 에두아르트 크렘저라는 인물이었는데, 브루크너가 린츠의 교원양성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같이 일하기도 했던 터라 스스럼없이 창단 기념작을 위촉하게 되었다.
브루크너는 이번에도 질버슈타인의 시 '헬골란트' 를 가사로 골랐는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헬골란트(북해에 실제로 있는 섬으로, 지금도 독일 영토임) 게르만 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내용이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가 로마까의 모습을 보여준 셈인데, 게다가 전사들이 기도를 올리는 신도 북유럽 신화의 주신인 보탄임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브루크너의 의도는 꽤 복잡한 시대 상황과 얽혀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그 당시 이탈리아에게 베네치아를 비롯한 영토를 계속 빼앗기면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와 지역에서 게르만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지 않을 수 없었고, 브루크너는 천주교 신자이기 이전에 오스트리아인이었음을 더 강하게 인식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브루크너는 마지막 교향곡이자 미완성작이 된 교향곡 9번의 작곡을 하고 있었는데, 이 위촉 때문에 작업을 잠시 미뤄두고 4개월 남짓 창작에 매달려 8월 초순에 완성시켰다. 초연은 2개월 뒤인 1893년 10월에 빈의 황궁에 있는 겨울승마학교 특설 무대에서 열린 빈 남성합창 협회 창단 5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크렘저 지휘의 협회 합창단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진행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까지 임석해서 치른 공연이었는데, 브루크너의 곡은 대호평을 받았고 황제의 알현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슬릭 같이 브루크너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평론가들은 '브루크너가 남성합창 본래의 서정성을 완전히 짓밟았다' 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실제로 이 곡은 그 당시 남성합창단이 소화할 수 있었던 음역이나 음정의 차원을 뛰어넘고 있는데, 특히 제 1테너 파트의 경우 어지간해서는 진성으로 소화하기 무척 힘든 고음역이 자주 출몰하고 있다(당시 남성합창단들은 알토 파트에 이르는 음역까지 부르기로 유명했지만, 그 성역에서는 거의 가성(팔세토)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브루크너가 종교음악에서 보여준 고도의 대위법 진행이나 예측하기 힘든 반음계적인 화성 진행도 있어서, 합창단이 이 곡을 익히기 무척 어려워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관현악단도 통상 2관 편성이기는 하지만,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금관이 강조되어 있고 후반부에서는 교향곡 7번이나 8번의 느린 악장에서처럼 심벌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런 거칠고 강렬한 관현악 반주 위에서 남성합창단이 때로는 목이 쉬거나 성대를 다칠 위험까지 감수하고 노래해야 하는 것이 이 곡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그 때문인지, 이 곡의 녹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심지어 초연했던 빈 남성합창 협회의 공식적인 레퍼토리나 음반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2회)과 윈 모리스(Wyn Morris. 1회) 정도가 온라인 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음원일 뿐이다.
바렌보임은 시카고 교향악단(도이체 그라모폰. 0-9번)과 베를린 필(텔덱. 1-9번)을 지휘해 브루크너 교향곡집을 남겼는데, 두 세트의 곁다리로 모두 이 헬골란트를 골라 녹음했다. 시카고 교향악단 녹음에는 악단 부속 합창단인 시카고 교향 합창단의 남성부가, 베를린 필 녹음에서는 베를린 방송 합창단과 에른스트 젠프 합창단의 남성부가 노래했다고 하는데, 아직 둘 다 들어보지는 못했다.
처음 들었던 것이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 목록 사이트인 abruckner.com의 다운로드 란에 잠시 올라와 있었던 것이었는데, 윈 모리스가 자신이 창단한 사설 관현악단인 심포니카 오브 런던(Symphonica of London)과 암브로시안 싱어즈(Ambrosian Singers)의 남성부를 대동하고 녹음한 것이었다(영국 IMP. 폐반).
ⓟ 1993 Innovative Music Productions
모리스는 영국 지휘자임에도 특이하게 베토벤이나 브루크너, 말러 등 독일 음악을 주로 다루었고, 그것도 남들이 좀처럼 다루려 하지 않는 것들만 골라 녹음하는 독특한 취향이었다. 가령 지난번 잘근잘근 씹었던 배리 쿠퍼의 베토벤 교향곡 10번 보작(이라고 쓰고 창작이라고 읽는다)이나 말러 교향곡 1번의 초기 교향시판, 10번의 데릭 쿡 연주회용 판본 등이 그 예인데, 지금은 거의 다 폐반되어 있는 상태다(말러-쿡 10번의 경우 스크리벤덤에서 CD로 복각한 것은 구할 수 있다).
프리 다운로드로 올라왔을 때 잽싸게 받아놓은 것이 다행이었는데, 몇달 뒤 저작권 문제로 클레임이 들어왔는지 사이트 주인장이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커플링한 곡도 마찬가지로 연주가 뜸한 바그너의 '사도 애찬' 이었는데, 브루크너 사이트였기 때문에 저 곡은 올라오지 못했고.
아무튼 얼마나 어렵길래 그리도 공연이 안되는지 들어봤는데,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아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어찌나 난이도가 높은지 영국 유명 합창단 반열에 드는 암브로시안 싱어즈의 남성부 단원들-특히 제 1테너 성부-마저도 가끔 삐걱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선전했다' 는 느낌이 들 정도다.
브루크너는 과연 이 무지막지한 남성합창곡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아쉬움에 비판하듯이, 이 곡을 쓰지 않고 교향곡 9번 창작에 주력해 완성시켰다면? 그리고 기교 문제로 합창단들이 다루기 꺼려하는 모습이 지금도 연출되고 있는 것을 혹시 브루크너가 알고 있다면?
물론 거의 부질없는 질문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명곡이 때로는 연주 불가능이라는 비난을 받거나 이해할 수 없는 면모로 가득차 있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곡이 던지는 화두 또한 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뱀다리: 혹시 과거에 꽤나 날렸던 붉은 군대 합창단이나, 아니면 지금도 저 윗쪽에서 뽀글이 할배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조선인민군 공훈국가합창단 정도면 그래도 저 대난곡을 어떻게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까라면 까는 군바리 스피릿을 저 '헬골란트' 에 적용시킨다면, 그 결과물이 어떻든 간에 꽤 흥미있는 시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